구자혁 4

공장에서 카페로, 그리고 광장으로

[2016.02 제28호 화요일의 약속]

공장에서 카페로, 그리고 광장으로

서촌 꼬뮤니따 혁이네 대표 구자혁

 

사진·글|현린 편집위원, 문화예술위원장

 

 

 

요즘 ‘핫 플레이스’로 뜬 서촌의 옥인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이상한 공간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핸드드립 커피와 음료를 즐길 수 있다는 걸 보면 최근 이 동네에 부쩍 늘었다는 카페 중 하나인 듯하다. 하지만 한국화나 기타를 가르친다는 안내문도 붙은 걸 보면 카페만은 아닌 듯도 하다. 게다가 서촌의 파리바게트 효자점과 통영생선구이가 강제집행으로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며 이 가게들을 지키자고 호소하는 게시물도 붙여놓은 걸 보면, 결코 예사로운 공간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대형유리 너머에 진열된 단 한 권의 붉은 책이 낯익다. 다름 아닌 『미래에서 온 편지』 27호. 매달 진열해 놓는다는 『미래에서 온 편지』 때문이라도 노동당원이라면 한번쯤은 선뜻 들어가 보고 싶은 공간이다.

다섯 번째 화요일의 약속은 이곳에서 잡았다. 얼마 남지 않은 노동당의 지역거점공간 중 하나인 ‘서촌 꼬뮤니까 혁이네’. 한낮에도 영하 10도를 밑도는 혹한기라 서둘러 문을 열고 들어서니, 과거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이하 노문연)에서 활동했고, 진보신당 문화예술위원회를 발족시켰으며, 현재 노동당 서울시당 부위원장이자 종로·중구 당원협의회 위원장으로 있는 구자혁 동지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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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예술정책의 두 가지 위기

[2016.01 제27호 화요일의 약속]

한국 문화예술정책의 두 가지 위기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염신규

 

사진·글|현린 편집위원, 문화예술위원장

 

 

 

그는 93학번 국문학도였다. 하지만 문화를 매개로 사회운동을 하고 싶었던 그는, 문학제가 아닌 영화제를 기획했다. 졸업 후에는 직접 픽션영화를 찍으려고도 했으나,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판단해 결국 영화의 꿈은 접었다. 대신에 영화감독 이창동이 문화관광부 장관이 되던 2003년, 선배의 계략에 넘어가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민예총) 정책팀장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민예총의 정책 기능이 소멸했다고 판단해서 2009년 민예총을 그만둔 후에는, 옛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노문연) 활동가들이 중심이 된 문화예술 사회적 협동조합 ‘자바르떼’에 결합한다. 그곳에서 지역문화예술 활동의 어려움을 몸소 체험한 후에는 시인 출신 국회의원 도종환의 비서관으로 일하며 문화기본법 제정에 관여한다. 의도한 일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요컨대 그는 90년대 학번이면서도 80년대 말 문화운동의 끝자락을 경험하였고, 90년대 문화운동의 산물이 어떻게 2000년대 참여정부 문화예술정책에 반영되었는지를 목격했으며, 불과 얼마 전까지 여의도에서 문화예술 관련 법안을 만들어왔다. 지나간 문화운동의 한 세대를 증언하고 다음 세대를 위한 조언을 할 만한 사람으로 그를 빼놓을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네 번째 화요일의 약속은 한때 영화감독을 꿈꾸던 청년, 그러나 지금은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이라는 건조한 직책을 맡은 염신규 문화정책연구가와 잡았다.

 

미래에서 온 편지(아래 미) : 최근의 총선에서 각 정당이 내놓은 문화예술정책들을 비교해 보면 여당이나 야당이나 비슷비슷하다. 심지어 두 거대 보수정당들의 문화예술정책과 진보정당들의 문화예술정책을 구별하기도 힘들어졌다.

염신규(아래 염) : 한국 문화정책이라는 게 70년대 초반에 본격적으로 정책영역에 들어왔지만, 90년대 후반까지 크게 변화가 없었다. 데칼코마니라고 해야 할까, 박정희 정권의 민족문화정책과 이에 대항하는 아래로부터의 민족문화운동은, 서로 지향점이 달랐지만 근대적 한국문화가 무엇인가 질문을 던졌다는 점에서는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알다시피 박정희 정부는 민족문화중흥이라는 걸 앞세워 문화영역 전체를 국가관리체계 속에 집어넣으려 했다. 한국적 민주주의처럼, 한국적 문화가 무엇인지를 국가적 차원에서 만들었다. 예컨대 1973년에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을 만들었는데, 80년대 중반까지 이 기관의 주요사업이 한국학 연구였다. 곳곳에 위인 동상을 세운 것도 그렇고, 관제화된 민족문화를 퍼트리려 했다. 소위 말하는 진보적 문화운동도 70년대 초반에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박정희 유신정권이 예술가들의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면서 김지하 씨의 오적필화 사건과 문인간첩단 사건이 터지고, 한국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만들어졌다. 이런 운동이 지금의 민예총을 낳은 민족문화운동으로 이어졌다. 예컨대 조동일 교수의 판소리, 탈춤 부흥운동 등이 그렇다. 그런 흐름들이 90년대까지 이어지면서 다른 정책에 비해 한국의 문화정책 발전이 지체되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문화운동을 했던 집단들이 지금보다 왕성하게 활동했고, 문화연대라든가 민예총의 정책기능이 살아있었다. 초창기 참여정부는 과거 정부와 달리 적어도 문화정책에서만큼은 진보적인 의제를 많이 수용하려고 했고 토론회도 자주 열었다. 그래서 문화연대나 민예총 등에서 문화정책을 연구하던 사람들이 상당히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 결과 2004년 참여정부에서 『예술의 힘 – 새로운 한국의 예술정책』과 『창의한국 – 21세기 새로운 문화의 비전』을 출간했다. 현재까지 나온 문화정책 의제들이 이 두 권 안에 다 들어있다. 그 후 10년 동안 문화운동계나 보수적 행정부나 가릴 것 없이 참여정부 초창기에 세팅됐던 이 의제들 중에 필요한 것을 써왔다.

 

문화운동주체들의 배제 또는 소멸의 위기

 

미 : 당시 진보적이었다는 그 정책들 다수가 실현되지 않은 원인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염 : 문화정책 관련 실무를 담당하는 입장에서 참여정부 당시의 정책수립과정을 긍정적으로만 보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정책이 너무 많이 쏟아져 나왔다. 정책이라는 게 현장의 변화 속도와 비슷하게 가야하는데, 문화이론이나 정책이론 공부한 입장에서는 준비를 많이 했다지만, 현장은 그렇지 못했다. 지역의 문화분권, 문화자치가 중요하다면서 2001년에 이미 지역문화의 해를 선포했지만, 막상 지역에서는 문화자치를 할 역량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들어보지도 못한 담론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책이 현장으로 전달되려면 행정을 거쳐야 하는데, 행정체계가 다양한 문화담론을 수용할 만한 단계가 아니었다. 정교한 문화담론에 기반을 둔 정책들도 행정을 거치면서 단순한 한두 줄의 사업으로 단순화되고 말았다. ‘문화다양성’ 개념이 대표적인 예이다. 문화다양성은 다양한 문화정책에서 일관적으로 관철되어야 하는 관점의 문제이다. 그런데 막상 정부정책으로 들어가면 이주노동자들이나 이주여성들 대상으로 하는 ‘문화다양성 사업’이라는 하나의 개별사업이 되고 말아서, 다른 문화사업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미 : 문화운동계 활동가들이 정부정책안 마련에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정작 현장 문화운동은 약화되었다? 같은 시기, 민주노동당이 원내진출을 했지만 정작 현장 노동운동은 약화되었던 상황과 일치한다. 우연의 일치는 아닌 듯하다.

염 : 2000년대 중반 민예총 활동하면서 처음 위기감을 느꼈다. 소비문화 외 민간문화운동 영역이 위축되었다. 참여정부 당시 나뿐만 아니라 활동하던 사람 대부분이 그런 걸 느꼈다. 영상문화운동을 예로 들자면, 2000년대 이후로 영상문화를 즐길 수 있는 인프라가 풍부해졌다. 미디어센터도 많아지고, 예술영화전용관도 생기고, 시민들이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있는 인프라 자체는 좋아졌다. 하지만 상업영화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를 개별적으로 소비한다. 영화를 가지고 타인들과 소통하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문화는 약화되었다.

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대학에서 풍물패나 노래패 활동을 하면, 그런 곳에서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관심을 가져주었다. 꽃다지가 공연을 하면 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최소한 젊은 세대들은 당장 경제적 이득이 없어도 그 문화(활동)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해방감을 느꼈고, 문화라는 틀 안에서 노동·통일 외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에 관해 소통했다. 그런데 IMF 사태 이후 돈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사회로 바뀌었고, 청년세대가 생존에 떠밀리면서 문화주체가 형성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미 : 그나마 참여정부의 문화예술정책 기조도 초기의 시민의 문화향유권 신장이나 문화민주주의 확대에서 문화산업주의로 완전히 방향을 틀었다.

염 : 문화민주주의와 같이 문화에서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려고 한 사람들이 힘을 얻었던 시절은 이창동 장관이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까지였다. 사실 정권 초기 1~2년 동안 외부에서 들어간 정책연구자들과 관료들 사이에서 경쟁이 치열했다. 하지만 관료들은 행정 관련 정보를 거의 독점하고 있어서 이기기가 쉽지 않다. 결국 정태인이나 이창동이 물러나면서 다시 관료주의적으로 돌아섰고, 문화산업발전을 위해 각종 규제를 풀기 시작했다. 이런 면에서 참여정부 시절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다. 주의·주장을 행정 안에서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 제도적인 측면에서 디테일한 검토를 해야 한다. 쉽지 않다. 그런 전문가그룹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다.

미 : 흥미롭게도 참여정부 시절 준비하던 문화기본법이 박근혜 정부 들어서 마침내 제정되었다. 참여정부 당시 준비하던 문화기본법과 현재의 문화기본법에 차이가 있는가?

염 : 나도 국회에 있었기 때문에 문화기본법 제정에 관여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출신인 새누리당 김장실 의원실에서 발의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실제로는 정부안이다. 그런데 현재의 문화기본법은 문화부의 업무를 나열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문화기본법이 아니라 ‘문화부 업무를 위한 기본법’이다. 애초 문화기본법 제정에는 2가지 취지가 있었다. 첫째는, 1972년에 제정된 후 40년 이상 수정해 오면서 누더기처럼 이상해진 문화예술진흥법을 손봐서 법적인 체계를 정비하자는 것이었다. 둘째는, 문화민주주의 이념에 따라 국민의 문화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법적체계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현재 문화기본법은 2가지 취지 중 문화 관련 법체계를 정비한다는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그러나 문화예술에 관한 시민의 권리, 문화예술이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구체화시키는 일은 배제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문화기본법이 이렇게 형식적으로 만들어지는 데 동의하기 힘들었다. 이런 법이 우리 삶에서 왜 중요한지 국민들이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문화기본법이 만들어지기를 바랐는데, 그런 과정이 전혀 없었다. 그 결과, 문화예술인이나 일반시민이 문화기본법을 잘 알지도 못하고 이걸 만들어서 뭘 할 수 있는지 상상할 수도 없다. 참여정부 당시 문화헌장을 문화헌정제정위원회를 통해서 만들었듯이, 문화기본법도 일개 의원실에서 만들 것이 아니라 제정위원회를 만들어서 1년간의 논의과정을 통해 만들어야 했다. 문화기본법이 왜 필요하고,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소통도 하고, 가치도 공유하고, 홍보도 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박근혜 정부는 문화기본법을 그런 규모에서 생각하지 않았고, 문화헌장에 제시된 문화를 통한 진보적 가치를 실현한 의지도 없었다.

법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전문가를 포함한 굉장히 폭넓은 분야의 사람들 사이의 토의가 필요하다. 물론 많이 싸울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문화란 무엇인가, 문화적 권리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놓고, 서로 다른 의견을 들을 필요가 있다. 문화예술을 보수적으로 예술영역으로 축소시켜서 보는 입장도 있지만, 광역화시켜서 보는 관점도 있다. 엘리트적인 관점에서 보는 입장도 있지만, 전혀 반대에서 보는 입장도 있다. 그런 모든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1년 정도 박 터지게 싸우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게 거버넌스다.

 

문화부 관료들의 전문화의 위기

 

미 : 문화기본법 제정과정도 그렇고 각종 문화예술정책 실행과정도 그렇고, 시민들이 참여하는 문화운동적 차원의 토대가 없으면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보인다. 현재의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여건에서 문화운동이 부활할 수 있다고 보는가?

염 : 인적자원의 풀 자체는 과거보다 넓어졌고 다양해졌다. 중앙정부 차원에서 이뤄지지 않지만 지자체나 지역공동체 차원에서는 다양한 활동이 이뤄지기 때문에, 경험이 축적되어있다. 그리고 과거 문화운동계 선배들은 완전히 제도권 밖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문화정책을 현실화 시키는데 한계가 있었지만, 현재는 참여정부를 통한 행정경험도 있다. 서울 성북구의 예에서 보듯 중앙정부 차원에서 하기 힘들었던 문화정책을 지역사회에서 실험하고 활동하는 등 현장성 있는 정책들이 실험되고 있다. 지금은 개별적으로 산개해있긴 한데, 여하간 제도 안에서 실험된 것이기 때문에 제도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졌고, 실제로 문화정책을 현실적으로 실현하는 데 있어 경험도 늘었다.

반면 또 다른 위기감을 느끼게 하는 부분도 있다. 참여정부 시절에 문화운동진영 사람들이 한국의 문화행정체계를 경험했다면, 반대로 문화부 관료들은 이쪽에서 이루어지는 정책 이슈들을 경험했다. 과거 십 수 년 전에는 문화부 관료들이 지금처럼 실력이 좋지 않았다. 문화정책이 중요하지도 않았고, 문화부가 인기도 없는 부처였고 해서, 문화부 관료들 중에 정책 전문가들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문화부처 관료들이 과거에 비해 전문화되고 있다. 더구나 국가는 예산과 정보와 인적 인프라를 키울 수 있는 안정적 틀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 정부 관료들의 정책적 전문성은 나아지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시민문화 인프라는 풍부하지도 않은데다 활동가나 역량을 재생산하는 구조도 갖추고 있지 않다. 문화활동은 활발하게 하고 있지만 문화정책 영역에서는 인력도, 물적 토대도 부족하다. 참여정부 5년 동안 많은 이슈들을 놓고 정부와 협력하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면서 활동가들이 많이 지쳤다. 80년대 후반 민예총, 90년대 후반 문화연대 설립 이후, 민간에서 키워왔던 역량을 다 소모해 버린 것이다. 이렇게 가면 정책이라는 게 한두 사람의 전문가에 의해 이뤄지고 기본적인 민주성을 갖기 힘들게 된다. 정책이 뿌려지는 형태로 집행될 수밖에 없고, 현장의 문제들은 묵살될 수 있다.

미 : 그런 점에서 당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현재 노동당은 문화예술정책안을 생산할 만한 토대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과거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문화예술정책 생산에 참여했던 이들도 지금은 흩어져 있는 상황이다.

염 : 진보정당의 역사 속에서 NL 계열은 통일 정책에 주력해 왔고, PD 계열은 노동과 복지 정책에 주력해 왔다. 그것 외에 다른 사회정책을 다루기에는 여러 모로 여건이 갖춰지지 않았다. 제반 정책 생산에서 진보정당이 부르주아 정당에 비해 역량이 부족한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운동영역에서도 진보적 가치를 문화 속에 투영시키는 데에 있어서 역량이 부족하다.

사실 민주노동당 시절로 돌아가 봐도, 민주노동당이 개별적인 의제들을 많이 던지기는 했지만, 그것은 당시 워낙 많은 문화정책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당에서 써먹을 아이템들이 많아서 그랬던 것이지, 당 안에 문화예술정책을 생산할 역량이 충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민주노동당 시절 문화예술위원회가 있었지만, 당시 문화예술위원회를 과거의 문선대 관점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문화예술정책에 대한 연구가 충분히 이뤄질 수 없었다.

한 예로, 18대 총선 당시 민주노동당 문화정책을 만들려고 정책단위를 급조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정의당으로 간 이지안 부장이 실무자였는데, 이지안 부장이 워낙 문화단체들과 교류를 많이 하던 사람이라 인맥이 넓었다. 그래서 자신이랑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아서 뚝딱 문화정책을 만들었다. 평소에 논의를 하면서 만들어야 하는데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나마도 그때 민주노동당이 지금 노동당보다 인적 풀이 컸으니까 가능했다.

남아있는 소수의 문화정책가들도 과거의 문제의식을 진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은 새로운 이야기를 못하는 부분도 있다. 필요한 문화정책이 무엇인가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당 차원의 투자를 통해서 정책역량을 지금보다 훨씬 끌어올리지 않으면, 정책의 주도성을 정부한테 내줄 수밖에 없다. 지금 같은 식으로 가서는 정부정책 뒤따라 잡기 수준을 넘기 힘들다.

 

삶에 일어날 변화를 상상하게 하는 공약이 필요

 

미 :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임금을 인상하는 것이 인간다운 삶을 위한 그릇이라면, 그 그릇을 채우는 것이 문화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중장기적으로 반드시 수행해야 할 과제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당장 2016년 총선을 대비해서 문화예술정책을 준비해야 한다. 과연 기존의 문화예술정책을 넘어서는, 그러면서도 가장 노동당 정책다운 문화예술정책을 준비할 수 있을지 고민이다.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염 : 진보정당으로서 내가 속해 있는 당의 문화정책이 수구정당이나 자유주의적인 보수정당의 문화정책과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나 역시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고민이긴 한데, 늘 부족하다. 그런데 나 혼자 풀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국가정책 전체를 포괄할 정도의 정책을 마련하기는 힘들 것이라 본다. 오히려 당이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유권자들 피부에 와 닿는 몇 가지 아이템을 만들어서 당 내외 사람들을 모아 함께 논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그냥 문화향유권을 높이겠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소리이고, 아무 의미가 없다. 이게 왜 필요하고,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 완결성 있는 정책을 몇 가지라도 내 놓을 수 있어야 한다. 가지 수는 적어도 조리가 잘 된 정책안을 내 놓을 필요가 있다. 꼭 역량 있는 사람만 모일 필요도 없다. 관련된 사람들,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서, 상당히 세부적인 실현방안까지 준비할 필요가 있다. 공약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삶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 상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보편적 복지 차원에서 문화향유권을 실제적으로 확대할 수 있는 정책도 더 구체화된 단어를 통해서, 예를 들면 문화급여 같은 것을 통해서 제시할 수 있다. 장례급여처럼 국민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하는 10대 기본급여라는 것이 있다. 문화기본법에 의해 문화권이라는 것이 만들어졌으니, 문화적 향유권은 국가가 보장해야 하는 국민의 기본권이 되었고, 이에 따라 문화급여를 만들 수 있는 근거가 생겼다. 문화바우처라든가 문화카드 등 기존의 선별적 문화복지정책 대신에 이제는 문화급여라는 이름으로 보편적 문화복지정책을 만들고 필요한 예산을 정교하게 짜야 한다.

돈을 나눠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민들이 체험을 통해서 자기 문화적 취향이나 역량을 만들어 가는 것이 문화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이를 매개할 수 있는 인력들이 있어야 한다. 지역이나 커뮤니티 단위에서 문화복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할 수 있는 전문 인력과 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장이 있어야 한다. 재원은 중앙정부에서 책임을 가지고 확보를 하더라도 지역문화 생활권에서 향유할 프로그램 자체는 그 생활권에 있는 문화 매개자들이 자율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 외에 표현의 자유 경우에도 적극적 관점의 표현의 자유를 구현할 수 있는 정책안을 준비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표현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면, 북유럽의 경우에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를 법적으로 처벌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예를 들어, 성소수자들이 문화제를 하는데 종교단체에서 이에 대한 반대집회를 하면, 이 집회는 법적 처벌 대상이 된다. 국가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현 정권 아래에서 하기 민망한 얘기이긴 하지만, 한국도 국가가 나서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당에서 기존에 계속 의제로 삼아 왔던 것이 예술인 복지의 문제인데, 기본적으로 계속 가져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다만 지금의 예술인 복지사업 수준에서 머물지 않고 예술노동이라는 기본 관점부터 시작해서 틀 자체를 새롭게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최소한 다른 정당의 정책과는 차별화된 제안은 내 놓을 수 있다고 본다.

화약1_오오극장

오오극장에 판타지는 없다

[2016.12 제26호 화요일의 약속]

오오극장에 판타지는 없다

한상훈 대구 민예총 사무처장

 

사진·글|현린 편집위원, 문화예술위원장

 

 

 

대구에 하나밖에 없다는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에서 나는 영화 대신 한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가깝게는 그 날의 오오극장에 관하여, 멀게는 백 년 전 대구역에 관하여 세 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각자 다른 시간을 산다. 누군가는 타임라인을 따라 숨 가쁘게 달리고 있지만, 또 누군가는 백 년 전 어느 시간에 머물러 있다. 그 때문일 것이다. 어느 누구도 상대를 배신하지 않았는데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배신당했다고 느끼는 이유는. 실제로 우리를 배신한 것은 앞에 있는 그 상대가 아니라 자신의 속도가 만들어 낸 상대에 대한 ‘판타지’였을 뿐인데도 우리는 자신의 속도를 높이려고도 낮추려고도 하지 않고 다만 상대에게 배신자라는 딱지를 붙이기 바쁘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고속열차 안에서 깜깜한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했다. 아무도 속도를 높이거나 낮추려고 하지 않을 때 서로를 다시 만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문득 떠오른 한 음절 단어에 나는 웃었다.

 

예술대학이 가장 많은 도시, 대구

 

미래에서 온 편지(이하 미) : 여기 오오극장이라는 곳은 언제 만들었나?

한상훈(이하 한) : 독립영화가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대구에는 그 영화들을 보여줄 공간이 없었다. 서울에는 세 개 정도 있지만 서울 외 지역은 여기가 처음이다. 대구에서 가장 빨리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지역은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지원을 바라고 있었지만, 대구는 절대로 (지원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서 그냥 우리가 직접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구경북독립영화협회, 미디어핀다, 대구 민예총, 세 군데가 설립추진단체가 되어 영화관 의자 한 석을 50만 원씩에 팔고, 1만 원, 2만 원씩 후원금을 모았다.

큰 극장들이 판타지나 스펙터클을 보여준다면, 오오극장은 자기 이야기를 보여준다. 김성근 감독이 나오는 《파울볼》(2014) 같은 영화는 야구부에서 많이 보러 오고, 호스피스에 관한 영화를 상영하면 호스피스 할머니들이 30년 만에 영화를 보러 오는 식이다. 그래서 내년에는 보잘것없는 영화라도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영화를 더 많이 상영할 계획이다. ‘내 인생의 영화’라는 타이틀로, 구두닦이 아저씨가 좋아했던 영화가 있으면 그 아저씨를 초대해서 토크쇼를 하고 상영을 하고 싶다.

 

화약2_오오극장 내부

오오극장 내부

 

미 : 대구는 인디문화도 활성화되었고, 문화적으로 풍요로워 보인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한 : 대구는 일제가 병참기지로 쓰기 위해 만든 계획도시였고, 부자들이 많았다. 대구가 한국 사진의 중심도시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사진이 무척 비싼 예술 아닌가. 사진기가 집 한 채 값이었는데, 그런 사진기를 가진 사람이 많았다. 현대미술작품도 많이 거래될 만큼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고, 이를 기반으로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계명대부터 시작해서 예술 관련 대학들도 많다. 서울을 제외하고는 예술대학이 가장 많은 도시가 대구일 것이다.

사상적으로도 자유로운 지대였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다른 지역은 점령군에 따라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면서 학살도 벌어지고 했지만, 인민군이 대구까지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밖에서 보면 대구가 보수도시라고 생각하지만, 대구에서 진보단체들이 집회한다고 탄압하거나 하지 않는다.

민예총 전신으로 ‘예술마당 솔’이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대중강좌와 문화재 탐방 같은, 당시로서는 진보적이면서도 대중적인 사업을 워낙 잘 했다. 유홍준 선생의 《나의 문화 유산답사기》도 그 결과물이었다. 요즘 구도심 살리기, 골목투어 많이 하지 않나? 그걸 제일 먼저 했던 곳도 대구다. 거리문화시민연대의 권상구씨라고, 우리가 봤을 때 심각한 오타쿠인데, 이 양반이 20년 동안 골방에서 일본서적, 미국서적 들춰가며 대구근대사 연구를 했다. 그 양반이 하면서 이슈가 되고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 삶 안에서, 이 시장 안에서 대안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미 : 민예총에서는 언제, 어떻게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가?

한 : 민예총에는 2003~2004년 즈음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민예총 소식지 내는 거 도와달라고 해서 편집간사로 들어왔다. 민예총 하기 전에 유시민 씨가 했던 개혁국민정당의 대구 실무자로 일했다. 대구지하철참사 대책위에서 활동했고 단병호, 심상정 씨가 의회로 진출한 선거에서는 민주노동당 선거운동을 했다. 그 후 대구 민예총 사무처장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한 10년은 된 거 같다.

미 : 학교 다닐 때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나?

한 : 대학 들어가기 전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형 영향이 컸다. 형이 91학번인데 학생운동을 했다. 하지만 정작 대학 가서는 운동을 안 했다. 총장퇴진운동이 일어났는데, 선배들이 수업 거부하고 집회 나가라고 했다. 왜 나가야 하는지 설명을 요구했더니 화를 내고 욕을 하더라. 그 선배의 태도가 자기가 싸우겠다는 사람들의 그것과 너무 같다고 생각했다. 기본이 안 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안 따라 나갔다. 그 뒤 내가 영화동아리 회장을 할 때 자신들이 인권영화제를 하겠다고 해서 프로그램 만들고 상영까지 해줬는데, 약속했던 비용을 떼먹더라. 당시 교내 운동권들은 문제가 있었고, 같이 어울리기 싫었다.

미 : 예총이 대학에서 예술을 전공했던 사람들 위주였다면, 민예총은 동아리 활동을 했던 사람들 위주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때문에 민예총이 진보적 문화예술 활동을 많이 할 수 있었고. 그런데 지금은 예총과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민예총이 보수화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한 : 예총 입장에서 봤을 때 민예총은 아마추어였다. 하지만 예총에 기술자들이 많았다면, 민예총에는 기획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예총 행사 기획을 민예총에 맡기기도 했었다. 보수화 문제는, 민예총이 30년 됐다. 어떤 조직이든 30년 동안 한 조직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보수 아닌가? 그리고 민예총의 ‘민족예술’ 주창한 사람이 김지하였다. 그걸 주창한 사람이 맛이 갔는데 이 단체가 맛이 안 가는 게 이상하지 않나?(웃음) 대구 민예총도 94년에 생겨서 20년 정도 됐다. 바꿔야 할 것이 많다.
저항예술제를 제안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민예총에서 민족예술제라는 축제를 매년 했는데, 자기위안용의 초라한 축제였다. 민예총 멤버들이 올드해졌으면, 본인들이 끼지는 않더라도 젊은 예술가들의 저항성을 보여줄 수 있는 판을 깔아주고 그걸 확장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화약3_저항예술제

2015년 8월에 열린 제1회 저항예술제

 

미 : 저항예술제가 과연 저항적이었는가라는 비판도 있었다. 특히 박근혜 패러디에 관해서는 과연 패러디인지 단순한 모방이었는지 알 수 없다는 지적이 있었다.

한 : 그런 평가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구에서 비슷한 행사를 했었는데, 실패해도 괜찮다는 개념으로 진행했다. 예술가들을 보면, 관객들 적게 와서 지원금 못 받으면 어쩌나, 이런 거 해보고 싶은데 망하면 어쩌나 걱정이 많다. 그런 걱정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실험하고, 그 안에서 서로 통하는 동류들을 만나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만들고 싶었다.

사실 민중미술이라는 게 중간에 길을 잃었다. 민중미술이 과거에는 사회주의 혁명 전선을 위해 복무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민중미술가의 삶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이 삶 안에서, 이 시장 안에서 대안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아직까지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과정으로서 운동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판화가들은 자기 판화에 에디션 번호를 매기지 않았다. 그걸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운동을 하는 거였고, (자신의 판화를) 저잣거리에 사람들이 걸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번호를 매긴다. 팔아야 하니까. 신학철 선생님이 그린, 재벌 목 따는 그림 같은 걸 삼성이 1억 씩 주고 사 간다. 민중미술 화풍 안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니까, 나중에 10억 되고 100억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중미술 하던 선생님들도 시장에 다 편입됐단 얘기다.

이미 큰 싸움에는 졌다. 그 이후에 무엇을 할지가 문제다. 판화라는 게 많이 전파하기 위해서 선택한 매체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요즘의 카드뉴스가 민중미술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조금 리버럴하지만 이철수 선생님 작업이 재미있는 게, 민중미술 화가 중에 유일하게 팬시샵에 작품을 전시한다. 그 안에 옅게나마 메시지들이 들어있다. 나머지 민중미술 화가들의 그림은 거의 다 소위 시민사회 내지 노동계 안에서만 유통된다. 이철수 선생님은 화랑을 거치지 않고 자신이 직접 판다.

예전에 이철수 선생님 전시를 준비하다가 꾸중을 들었다. 전시장에 큰 방과 작은 방이 있었는데, 비용을 아낀다고 작은 방에 에어컨을 안 틀었다. 그랬더니 그러시더라. “운동한다는 생각만 하지 말고 서비스업 한다는 생각도 가져라. 다른 사람은 서비스를 받으러 오는데 너는 운동하고 있잖아.” 전시장에 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런 사람들을 문화예술운동에 젖어들게 하기 위해서 어떤 과정이 있어야 하는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예술’ 자체가 진보적인 활동 … 넓게 만드는 일도, 깊이 파는 일도 하면 된다

 

미 : 과거에는 문화재 탐방이라든가 도시탐방 같은 것을 진보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역마다 지자체나 지역의 문화재단의 지원 아래, 많은 경우 경제적 득실 계산 아래 이런 활동들이 진행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지역의 문화예술사업도 정치적 입장을 보다 선명히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 : 깊이와 넓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전태일문화제의 경우, 선배들이 자문을 부탁했을 때 처음에는 하지 말자고 했다. 저쪽에서 이승복 내세우는 것처럼 이쪽에서 전태일을 내세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신에 더 대중적인 사업을 제안했다. 대구의 대표인물이라고 하면 이병철, 박근혜, 전두환, 노태우 같은 슈퍼히어로 권력자와 재벌 아닌가? 그래서 보통사람의 영웅으로서 전태일을 내세울 수 있겠다 싶었다. 운동권의 언어 ‘전태일 열사’ 이런 말보다는, 48년생이니까 ‘1948년 대구생 전태일’이라고 하고 48년생 대구사람들을 찾아서 그 시절의 이야기, 전태일의 이야기를 같이 하는 것이다.

 

대구 오오극장 갤러리에서 열린 전태일 시전

대구 오오극장 갤러리에서 열린 전태일 시전 <울타리 밖의 전태일>

 

전태일을 가지고 지금의 노동현실에 관해 토론하는 일은 다른 사람이 하면 된다. 그런데 깊어져야 한다면서 넓어지면 안 된다고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넓게 만드는 일도 하고 깊이 파는 일도 하면 된다. 골목투어도 지금 많이 넓어진 건데, 깊어지는 것도 만들면 된다. 하지만 저건 안 된다고 할 필요는 없다. 골목투어는 민중생활사적인 역사를 배우는 과정이다. 위인전기보다 훨씬 낫다. 이게 뾰족하게 보이지 않는다면 뾰족하게 보이는 사업을 하면 된다.

미 : 그런 뾰족한 사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당원들이 아닐까?

한 : 지금 노동당은 너무 슬로건중심 사업밖에 못 하고 있다. 권상구 같은 인물이 왜 중요하냐면, 그가 엄청난 성과를 내고 있는 데다 그 성과를 우파도 활용할 수 있고 좌파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노동당은 그 성과를 낳지는 못하고 활용만 하고 있다. 섹시한 슬로건들은 뽑아내지만 그것들이 빨리 휘발된다는 느낌이다. 지역에서 뿌리내리고 일하려면 어떤 한 영역에서 오랫동안 우물을 파듯이 깊게 파야 하는데, (노동당이 하는 사업은) 지금 우물을 파는 중인데 물을 바로 길어 가는 것과 같다. 골목투어도 ‘전태일 투어’라고 쉽게 이름 붙이고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그 메커니즘을 꾸준히 연구해야 한다. 대개 품이 많이 들어가고 전문적인 영역이다. 그런 일들을 노동당이 붙어서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하는 걸 봐서는 그러지 못할 것 같다.

미 : 민예총에서 활동하면서 정치적 노선으로 고민한 적은 없었나?

한 : 민예총의 정치적인 스펙트럼은 무척 넓다. 새누리당에 가까운 사람부터 사회당보다 더 좌파인 사람까지 다 있다. 그래서 한때는 우리가 전선조직으로서 정치적 정체성을 명확히 해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그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면 큰 조직이 될 수 없겠더라. 예술인 네트워크로서, 적어도 새누리당은 아니라는 최소한의 지향 정도만 지키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예술’ 자체가 진보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그런 활동을 하는데, 당 색깔이나 이름을 드러내야만 할까 의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지역에서는 서로의 성향을 잘 안다.

그리고 별로 의미 없다고 생각되는 예술가들도 같이 계속 몸으로 부대끼면 바뀐다. 세월호 사안의 경우 그런 성향이 아닌데도 합류한 예술가들이 있었는데, 부대끼면서 신뢰를 쌓으니까 우리 쪽으로 들어오더라. 예술가라는 사람들이 자기 현실을 보면 결국 좌파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은 일반적이지 않고 돈을 많이 못 번다. 정부정책 자체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동질감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 맺기를 잘만 하면, 얼마든지 우리와 좋은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동산업자하고 뭘 하자고 하면 힘들다. 하지만 예술가하고는 그렇지 않다.

 

창작활동을 마음 놓고 할 수 있어야 ‘자립’이다

 

미 : 요즘 예술가들에 대한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지원을 두고 말이 많다. 얼마 되지도 않는 지원금을 가지고 예술가들을 검열하고 통제한다는 비판도 있고, 지자체나 문화재단 좋은 일 하는 데 예술가들이 동원된다는 지적도 있다. 급기야 지원금을 거부하고 자립을 모색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한 : 자립은 판타지라고 생각한다. 진짜 능력 있는 1퍼센트는 자립이 가능하겠으나 나머지는 힘들다. 보통 자립하고 지원금 받지 말자는 분들은 이미 혼자 선 분들인데, 그 분들도 혼자 서기까지의 과정이 있었다. 지금 자립하지 못하고 겸업을 하는 예술가들이 지원금을 받지 않으면 아마 예술 비중을 줄이고 다른 일을 더 할 것이다. 그게 자립인가? 자기 인생에서 자립은 될 수 있겠으나 예술가로서의 자립은 아니다.

진짜 자립이란 정책적인 지원까지 포함한 것이라 생각한다. 관공서에서 돈을 안 받는다고 해서 자립이 아니다. 예술가들의 자립은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산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창작활동을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때를 말한다. 그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은 예술행정가, 예술단체, 예술정책전문가들의 몫이다. 오오극장 만든 것도 악으로 깡으로 한 거다. 그런데 올해 50만 원 씩 낸 사람이 한 60명 되는데, 그 사람들한테 다음에 또 50만 원 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한계가 있다. 그 우물이라는 게 마를까봐 늘 걱정이다.

지금은 예술가를 지원하라고 나온 돈이 누구에게 가야 하는지, 제대로 갈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목소리를 내는 일이 중요하다. 지원금을 받지 않는 게 대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원을 받되 간섭은 받지 않는 체계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권력의 들러리가 아니라 제대로 예술가를 지원할 수 있는 방식들, 예술가들이 이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그 돈을 떳떳하게 받아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제일 좋은 방법은 거리공연을 하더라도 예술가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편적 복지가 안 되는 현재 상황에서는 문화재단을 변화시켜야 한다. 예술가들이 시로부터 직접 지원 받을 때는, 아니꼽긴 했지만 절차가 간소했다. 지금은 시가 재단에 지원사업을 외주로 주고는 감사를 하니까 재단이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대구문화재단이 전국문화재단 평가 1위다. 서류를 너무 잘 만들어서 그렇다. 그런데 그럴수록 예술가는 힘들다. 재단에 민간 인력들이 더 들어가서 재단을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미 : 마지막으로,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활동이 있다면 들려 달라.

한 : 대구에 필요한 단체는 민예총보다도 문화연대 같은 문화예술 관련 정책그룹이라고 생각한다. 민예총에는 생활예술에 대해 전국적인 노선이나 예술교육에 대한 전국적인 노선, 현장예술에 대한 전국적인 노선이 없다. 마을공동체 사업을 한다고 할 때 필요한 ABC를 개발해서 공유해야 한다. 지금은 실제 필요한 일을 못 하고 대선 어떻게 할 거냐, 박근혜 정부 어떻게 할 거냐, 세월호 연장전 어떻게 할 거냐 고민한다. 이런 일을 하는 것도 맞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일상적 탄탄함이 있어야 하는데 그걸 너무 간과하고 있다. 민예총은 이런 걸 하기에 너무 바쁘다. 집중적으로 할 수 있는 별도의 기관이 필요하다.

예술가의 네트워크로 민예총이 아닌 다른 형식을 고민하고 있기도 하다. ‘민족예술’이라고 얘기하기도 힘들고 편견들도 있어서 민예총에 가입하라고 하기 힘들다. 그리고 민예총이 국가에서 원하는 사단법인 체제 하에 있다. 이사장이 있고, 이사가 있고, 피라미드 조직으로 국가가 통솔하기 좋은 형태이다. 예술가하고는 안 맞는다. 예총하고 똑같은 형태로 예총 대응조직을 만들었는데, 하는 일마저 예총 같으면 안 된다. 예술가들이 더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는 네트워크 조직을 고민 중이다.

제17회 변방연극제 십오원오십전 2015

무대에 정치적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

[2015.11 제25호 화요일의 약속]

무대에 정치적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

변방의 예술가, 임인자

 

사진·글|현린 편집위원, 문화예술위원장

 

 

지난여름 두 편의 연극을 보았다.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거장 고바야시 다키지의 소설 《게공선》(1929)을 각색한 ‘극단 공’의 동명 연극과 ‘성노동자권리모임 지지’ 활동가들의 토론극 《똑바로 나를 보라 2》. 두 연극 사이에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첫째, 두 작품 모두 세상에 잘 드러나지 않는 노동자들의 삶을 다루었다. 《게공선》은 게를 잡아 가공하는 어선이자 공장인 게공선 노동자의 삶을, 《똑바로 나를 보라 2》는 성노동자의 삶을. 둘째, 두 연극 모두 작품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서울 변두리 지역의 극장에서 상연되었다. 《게공선》은 서울 영등포구의 한 공장 2층에 있는 ‘인디아트홀 공’에서, 《똑바로 나를 보라 2》는 서울 성북구의 ‘미아리 예술극장’에서. 마지막으로 셋째, 두 연극 모두 공교롭게도 같은 연극제의 초청작이었다. 올해 벌써 17회째라고 하는 서울변방연극제.

공교롭게도? 아니다. 선후관계를 따지자면, 알고 보니 두 연극 모두 같은 연극제 초청작이었다고 할 것이 아니라, 서울변방연극제 초청작이었기 때문에 두 연극 모두 봤다고 해야 한다. 변방의 이야기를 변방의 방식으로 변방의 지역에서 들려주려는 신중한 기획의 산물이었다고나 할까. 2010년 봄에 인터넷 검색창을 뜨겁게 달궜던 ‘광화문 괴물녀’도 서울변방연극제 기획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임인자 예술감독이 있었다. 2010년부터 2015년까지 서울변방연극제의 예술감독으로 일해 온 임인자 감독 덕에, 우리는 미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최전방에 있는 연극들을 검색하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꼭 한 번 만나서 변방의 연극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고 싶었다. 마침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검열과 배제를 위한 블랙리스트를 가지고 있다는 괴소문도 들리는 바, 그에 관한 이야기도 들을 겸 두 번째 화요일의 약속은 임인자 예술감독과 잡았다.

2015년 8월 2일 《똑바로 나를 보라 2》 공연이 끝난 후의 임인자 예술감독

2015년 8월 2일 《똑바로 나를 보라 2》 공연이 끝난 후의 임인자 예술감독

 

화요일_홍진훤2

더 이상 식판 들고 줄 설 수는 없다

[2015.09·10 제24호(합본호) 화요일의 약속]

더 이상 식판 들고 줄 설 수는 없다

‘지금여기’의 사진가, 홍진훤

 

사진·글|현린 편집위원, 문화예술위원장

 

 

 

<화요일의 약속> 연재를 시작하며

일생 동안 우리는 무수히 많은 화요일을 살아왔고 또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 만큼 대개의 사람들에게 화요일은 월요일 다음 날이란 것 말고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날입니다. 그러나 노동당 당원을 비롯한 세계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적어도 두 화요일, 1818년 5월 5일 화요일과 2017년 11월 7일 화요일은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특별한 날입니다.

우선 1818년 5월 5일 화요일. 2백여 년 전 5월의 첫 화요일은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의 기초를 놓은 칼 마르크스가 태어난 날입니다. 어린이날치고는 아주 특별한 어린이가 태어난 화요일이죠. 1925년 조선공산당 건설을 주도한 ‘화요파’의 명칭도 마르크스가 태어난 화요일을 기념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예, 모두 과거의 일들입니다. 그럼 다음 화요일은 어떤가요?

2017년 11월 7일 화요일. 앞으로 2년 후 11월의 첫 화요일은 1917년 10월 혁명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건설 100주년을 기념하는 화요일입니다. 노동당 당원이자 사회주의자인 당신은 이날 어디서 무엇을 하실 계획인가요? 백 년 전 과거를 기념하는 데 머물지 않고, 백 년 후 미래가 기념할 만한 특별한 화요일로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화요일의 약속’, 줄여서 ‘화약’은 2017년 11월 7일 혁명 백주년 기념일을 말 그대로 불(火)의 요일로, 새로운 미래를 위한 기폭제로 만들자는 약속입니다. 《미래에서 온 편지》는 앞으로 매달 화요일, ‘화약’에 동의하는 좌파 문화예술인들을 만나서 그들이 어떻게 이 미래를 살아왔으며 살고 있는지 묻고 듣고 기록해서 독자들에게 배달합니다.

1945년 9월 조선공산당 재건 70주년을 기념하며
2015년 9월, 현린

 

 

지난 6월 이후 문학계의 최대 쟁점이 표절 논란이었다면, 같은 기간 사진계의 최대 쟁점은 사진상 심사의 공정성 논란이었다. 시작은 제2회 ‘최민식 사진상’ 대상 수상자가 이미 내정되어 있었던 것 아니냐, 일부 수상자가 사진상 운영위원 또는 심사위원과 사제지간 아니었느냐는 심사절차에 관한 논란이었다. 그러다 지금은 최민식 사진상이 표방하는 ‘인본주의 다큐멘터리 사진’이란 과연 무엇이냐는 개념 논쟁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최민식이라는 사진가의 인지도와 3천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상금 때문이었는지, SNS에서부터 시작된 논란은 일간지와 사진잡지를 통해 일파만파 퍼져 나갔고, 사진계에 한 발이라도 담그고 있다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보인 청년 사진가들의 반응이 흥미로웠다. 다들 어려운 조건에서 사진작업을 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청년 사진가들은 특별히 더 열악한 환경에 있다. 전업으로 자신의 사진작업을 하는 것은 이들에겐 꿈도 못 꿀 일. 대개는 아르바이트로 생계와 작업에 필요한 돈을 벌고, 각종 공모전이나 지원금 앞에 줄을 설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이들이야말로 이런 사진상 논란에 가장 민감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의외로 이들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청년 사진가 홍진훤의 표현을 빌자면, “분노의 타임라인을 접하고 우리가 내뱉은 일성”은 “우리도 분노하고 싶다!”였다. 하지만 ‘사피아(사진 마피아)’라 불리는 사진권력으로부터 워낙 떨어져 있어서인지 그들로서는 이 논란을 달구는 분노의 근거를 알 수조차 없었다. “사진판이 온통 분노로 뒤덮여 있는데 우리는 무엇에 분노해야 하는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그들로서는 관심을 가지려야 가질 수도 없었고 논쟁에 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 이 논란을 계기로 그들만의 대안을 모색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첫 번째 ‘화요일의 약속’은 사진가 홍진훤과 했다. 우선, 청년 사진가들이 어떤 대안을 모색 중인지 궁금했다. 더불어 디지털 카메라에 이어 카메라폰이 대중화됨으로써 전 국민이 사진작가라는 말도 나오는 시절에, 정작 사진을 업으로 삼는 청년 사진가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화요일의 약속’인 만큼, 9월 가을햇살이 가득했던 어느 화요일, 종로구 창신동 해발고도 70미터에 위치한 대안공간 ‘지금여기’를 찾았다.

 

밥줄로부터의 이탈

 

미래에서 온 편지(이하 미): 요즘 모든 국민이 사진작가라고들 한다. 사진을 업으로 삼는 작가 입장에서 이 말에 동의하는가?

화요일_홍진훤4홍진훤(이하 홍):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작업을 하느냐에 달렸다고 본다. 한국에서 완벽한 전업 작가는 손에 꼽는다. 내게는 프로와 아마추어란 말 자체도 손 오그라드는 말이다. 아무래도 그런 차이는 있다. 사진을 삶의 중심에 두고 고민하고 사는 사람과 사진을 부수적으로 하는 사람의 차이 같은 것. 하지만 작업이 좋으면 된다고 본다.

미: 그런 면에서 사진가 최민식은 특별하다. 그 자신은 주류 사진가가 아니었지만, 많은 사진가들에게 롤 모델이 되어왔다. 또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민식 사진상’이 만들어졌고 그 운영과 심사를 다시 사진계의 주류가 맡고 있다. 이번 논란도 결국 주류와 비주류 사이, 중심과 변방 사이의 권력투쟁이 핵심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작 비주류에 속한다고 할 젊은 사진가들의 반응이 시큰둥하다. 왜 그렇다고 보는가?

홍: 최민식 사진에 빚지지 않은 사진가가 있을까? 지금에 와서 그 사진이 저항적이냐 아니냐 하는 건 별개의 문제이고, 그 시절에 그런 사진(작업)을 올곧게 했다는 점은 기릴 만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민식 사진상’에 공모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최민식의 인본주의 사진철학 운운할 때부터 이건 우리와 상관없는 상이구나 직감했다. 실제로 주변의 젊은 사진가 대부분이 응모조차 하지 않은 걸로 안다. 그리고 첫 수상자가 워낙 전통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가였다. 그 뒤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다 이런 논란이 터졌고, 이 글 저 글 다 읽어 봤다. SNS가 어마어마한 분노로 가득한데 관심을 안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분노의 근거가 없었다. 사진상 운영진이 잘 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이렇게 들고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궁금해서 기자들한테도, 선배들한테도 물어봤다. 자기들끼리 다 해먹는다는 어떤 배제의 역사, 권력의 문제가 쌓이고 쌓여 폭발한 것이라고 짐작만 할 수 있을 뿐, 정확한 사실을 들을 수는 없었다. 우리도 분노해야 할 것 같고 분노하고 싶은데 누구도 우리에게 사실을 알려주지 않으니 그냥 웃다 말고, 비아냥거리다 말 수밖에 없었다.

미: 이 사건을 계기로 대안을 모색하기로 했다고 들었다. 어떻게 시작했고 어디쯤 와있는가?

홍: 이전부터 불만이 쌓여있었다. 논란 발생 후 겸사겸사 젊은 작가들, 기획자들, 기자들이 모였다. 그래서 얘기했던 것이, 그들이 했던 방식대로 그들을 치지는 말자는 거였다. 그건 꼰대 같으니까. 우리는 전혀 다른 지점에서 새로운 걸 해보자고 했다. 처음에는 좋은 사진상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작가들 지원제도를 고칠 수 있는가 함께 고민해봤다. 그런데 이것도 기존 시스템 안에서 헐떡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선은 우리끼리 사진을 존중하고 읽어보기로 했다. 사진은 물론이고 사진에 관한 글이나 사진과 관련된 공간에 관해 읽는 일부터 시작했다. 심사하고 줄 세우는 거 말고, 주기적으로 만나서 자랑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내기로 했다. 끝이 어디일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이 시대에 옆에서 작업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사람은 우리밖에 없다. 그리고 더 이상 식판 들고 줄 설 수는 없다.

 

지극히 사(회)적인 사진

 

미: 본인 사진 얘기를 해 보자. 2009년에 사진비평상 수상작도 그랬고, 2012년 <TAKE LEFT> 전시작도 저널리즘 사진에 가까웠다. 그런데 막상 개인전의 경우, 예컨대 2013년 <임시풍경>이나 2014년 <붉은, 초록>, 그리고 2015년 <마지막 밤(들)>에서는 저널리즘 사진과는 거리가 먼 스타일의 사진들을 전시했다. 어떤 이유가 있는가?

임시풍경 中 (2013)

임시풍경 中 (2013)

붉은, 초록 中 (2014)

붉은, 초록 中 (2014)

홍: 나에 대한 생각의 변화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저널리즘 사진을 보고 자랐고 그렇게 찍는 게 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널리즘 사진은 나랑 맞지 않았다. 나란 사람 자체가 주장 같은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급박한 현장에 적응도 잘 못하고, 순간 포착 같은 것도 못한다. 그런 것에 큰 감흥을 느끼지도 못하고 해서, 대신 현장 주변을 맴돌며 천천히 찍는다.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일치해야겠더라. 멋들어진 사진은 못 찍는다. 내 정서에 맞지도 않는다. 그러다 보니 좀 더 솔직하게, 솔직하게 찍는다. 그렇게 해야 오래 간다. 남들 시선 의식하지 않고, 스트레스 안 받는다.
2013년 첫 개인전을 할 무렵 사진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면서, 내가 말하고 싶은 내용과 방식, 뉘앙스 같은 것들을 사진적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세상이 바뀌어야 돼”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이게 우리가 만든 세상이구나”라며 흔들리는 내 마음을 확인하는 정도? 세상에 악은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 악과 내가 상관이 없다는 얘기는 못하겠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주 나쁘게 살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마어마하게 나쁜 풍경을 담고 싶지는 않다. 숨겨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 정도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

미: 홍진훤의 사진은 무척 개인적인 풍경으로 보이는데, 그 앞에 서면 늘 사회적인 풍경과 마주치게 된다. 의도한 것인가?

홍: 내가 사회에 관심이 많아서 내 이야기를 해도 자연스럽게 사회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싶다. 내 삶이 사회와 분리되지 않는 이상, 내가 관심의 끈을 놓지 않는 이상,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사회적인 이야기는 계속 나온다고 생각한다. 현장에 줄기차게 나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런 식으로 내 이야기를 통해 사회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남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특별한 기사거리를 만들고자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작업이 철저하게 사회적으로 작동하기를 원한다.

마지막 밤(들) 中 (2015)

마지막 밤(들) 中 (2015)

 

‘지금여기’ no-where

 

미: 전통적인 저널리즘 사진이나 다큐멘터리 사진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른바 순수예술 사진도 아니다. 그 때문에 이곳에도 저곳에도 끼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보여주기 위해서 찍는 사진인데, 사진을 보여줄 매체 또는 공간이 없다면 큰 문제다. 이 공간 ‘지금여기’를 마련한 이유도 그 때문인가?

홍: 공동운영자인 사진가 김익현과 함께 나와 같은 처지의 사진가들을 위한 대안공간을 늘 고민해 왔다. 미술이나 영화의 경우엔 일찍부터 대안공간 실험들이 있었지만 사진에는 없지 않았나. 어디에서도 불러주지 않는 사진가들이 모일 만한 공간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러던 중 갤러리에 들를 일이 있어 어릴 적 살았던 이곳 창신동에 오게 됐다. 예전 거리가 그대로 있었다. 서울 중심지 한가운데에 아직 이런 곳이 남아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동네가 너무 매력적이어서 처음엔 작업실을 구하려고 부동산 중개소를 통해 이곳저곳 찾아다녔다. 그러다 재봉 공장이었던 이곳을 발견하고는 홀딱 빠져서 김익현을 불러 계약을 해버렸다.

창신동 골목에 자리한 ‘지금여기’

창신동 골목에 자리한 ‘지금여기’

미: ‘지금여기’의 영문명이 ‘no-where’이다. 그런데 《미래에서 온 편지》의 제목도 윌리엄 모리스의 《News from Nowhere》에서 따온 것이다. 공간의 이름은 어떻게 지은 건가?

홍: 심보선 시인의 <지금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처음엔 시대착오적이지 않나 생각했다. 우리는 타임라인 속에 살고 있으니까. 그런데 영문으로 쓰고 보니 ‘no-where’로도 읽히더라. ‘지금여기(now-here)’라는 선언이면서 동시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못하는(no-where)’ 지금 우리의 처지를 보여주는 이름이라 생각해서 선택했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인간이기 위하여
사랑이기 위하여
無에서 無로 가는 도중에 있다는
초라한 간이역에 아주 잠깐 머물기 위하여

 

<지금 여기> 심보선

 

미: 집값이 싼 동네라고 하지만 넓은 공간이라 운영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동안 ‘지금여기’에서 기획한 좌담이나 전시들이 대관료를 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들도 아니었고. 운영비용은 어떻게 감당하는가?

‘지금여기’의 내부

‘지금여기’의 내부

홍: 월세로만 매달 70만 원이 나간다. 두 사람이 빡세게 아르바이트를 해서 조달한다. 가지고 있는 명함이 세 종류다. 사진가, 공간운영자 외에 스튜디오 디렉터이기도 하다. 사진촬영, 영상촬영, 영상편집, 책편집, 인쇄디자인, 전시기획, 부스설치 등이 다 가능한 사업자다. 처음엔 홈페이지 만들고 사진 찍는 일 외엔 아무 것도 못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끔씩 물어본다. 혹시 영상편집 할 줄 아냐, 책편집 할 줄 아냐, 우리 전시하는데 부스 만들 줄 아냐고. 그러면 무조건 다 할 줄 안다고 한다. 그리고는 돌아와서 혼자 배워서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재벌이 되어버렸다. 직원은 나 혼잔데. 돈 벌려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요새 다 그렇지 않나.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나. 조선일보와 삼성 일만 아니라면 뭐든지 한다.

미: 개인적으로 하는 사진작업과 상업적인 작업 사이에서 갈등이 많을 듯하다. 개인적으로 하는 작업은 예술이고 돈을 받고 하는 일은 예술이 아니라는 사람들도 다수 있다. 때문에 이들에게는 상업예술이라는 말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본인은 어떤가?

홍: 예술의 상업화에 대한 걱정이면 모르겠는데, 금전적인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해야 예술이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고? 옛날에는 한정된 소수만이 예술을 소비했다면 지금은 불특정 소비자에게 직접 파는 것이 가능해졌다. 먼저 팔지 않을 때 오히려 가격이 높아진다. 예술이냐 아니냐는 돈을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다. 돈 받아서 그들이 만들어 달라는 대로 만들었는데 쓰레기가 나올 때도 있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때도 있다.

 

예술가의 연대

 

미: 예술은 돈과 무관해야 한다는 논리로 많은 예술가에게 무료봉사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른바 재능기부다. 본인도 재능기부 경험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홍: 재능기부는 애매하다. 어디에는 서로의 노동력을 나눠 쓰는 공간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연대의 기본이라 생각한다. 《빅이슈》가 창간될 때 매력적인 사업이라 생각해서 내가 먼저 찾아가 재능기부를 하겠다고 했다. 그 조직은 품앗이가 필요하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서울시나 일반 기업에 재능기부를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재능기부 하는 예술가는 개념 있는 예술가라는 식으로 권장할 게 아니다. 좋은 품앗이는 서로가 주체가 된다. 하지만 관이나 기업에서 권하는 재능기부는 결국 갑과 을의 관계로 진행된다. 이런 경우에는 서로 하면 안 된다.

미: 그렇다면 정치조직인 정당과의 연대는 어떤가? 지금 여기 예술가들을 위해 노동당이 해야 할 역할이 있다면 말해 달라.

홍: 예술가들은 어느 정당에 소속되기가 힘들다. 소속돼도 당적이나 갖고 있지. 하지만 세월호 관련 기획들에서 보듯이 프로젝트 중심으로는 얼마든지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자기 작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중적인 작가부터 전위적인 작가까지 진보적인 예술가들 정말 많지 않나. 이들이 모일 수 있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판을 만들어주는 일을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진보정당에서 할 수 있을 것 같다. 꼭 당 깃발 꽂을 필요 없지 않나? 노동당 문예위나 정의당 문예위가 유의미한 공동기획을 한다면 참여할 작가들 많다.

미: 좋은 판을 마련하고 초대하면 본인도 응하겠다는 말인가?

홍: 물론이다. 안 할 이유가 없다. 젊은 작가들이 안 하고 싶겠냐. 판만 깔아주면 다 알아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