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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미 코빈(Jeremy Corbyn)은 노동당을 바꿀 수 있는가?

[2015.09·10 제24호(합본호) 먼 좌파 이웃 좌파 ⑱]

제레미 코빈(Jeremy Corbyn)은 노동당을 바꿀 수 있는가?

 

안효상|편집위원

 

 

 

지난 9월 12일, 예상대로 그것도 59.5퍼센트 득표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제레미 코빈이 노동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여기서 “예상대로”라는 말은 《더 타임즈》가 여론조사기관에 의뢰해서 실시한 7월 중순의 여론조사에서 코빈이 당시 유력 후보였던 앤디 버넘(Andy Burnham)을 상당한 차이로 따돌린 이후의 상황을 말한다. 6월 3일, 코빈이 “분명한 반긴축 정책”을 내걸고 당 대표 선거에 나가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그는 사실상 주변부 인물에 불과했다. 심지어 후보가 되기 위해 필요한 노동당 의원 35명의 추천을 받는 일조차 ‘강성 좌파’(hard left)라 불리는 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청년층을 중심으로 수많은 지지자들이 몰려들고, 유나이트(Unite the Union)와 유니즌(Unison) 등 주요 노조가 그를 지지하기로 하면서, 다크호스에 불과했던 코빈은 말 그대로 태풍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결국 당 대표가 되었다.

코빈이 돌풍을 일으키며 당 대표가 될 ‘위험’이 보이자, 토니 블레어(Tony Blair) 전 총리를 비롯한 노동당의 우파와 중도파 지도자들은 그의 당선을 막기 위한 신성동맹이라도 결성한 듯 발언을 쏟아냈다. 블레어는 코빈을 겨냥해서 “노동당은 중도로 가야 승리할 수 있으며” “1980년대 좌파 공약으로 돌아간다면 앞으로 20년간 권력을 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코빈이 당 대표가 되면 다음 선거에서 그냥 패배가 아니라 당이 “궤멸하고 소멸”할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이런 식의 포격은 계속 이어져, 어떤 노동당 의원은 코빈의 당선을 “노동당의 자살”이라고까지 말했다.

 

전통

 

토니 블레어가 먼저 1980년대 운운하긴 했지만, 신드롬이라고까지 할 만한 제레미 코빈의 부상을 보며 많은 사람들은 토니 벤(Tony Benn)을 떠올렸다(당 대표라는 자리를 감안하면 1930년대에 대표를 했던 조지 랜스베리(George Lansbury)가 있다). 토니 벤은 한때 벤주의자(Bennites)라는 말까지 만들어낼 정도로 인기가 있었던 대표적인 노동당 내 좌파 정치가로서, “각료직을 맡고 난 후 더 왼쪽으로 간 몇 안 되는 영국 정치가 가운데 한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1980년대 초반 노동당의 혁신과 좌경화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토니 벤

토니 벤

대처주의가 본격화되던 1980년 당 대회에서 토니 벤은 기조연설을 통해 노동당이 집권하면 산업 국유화, 자본 통제, 산업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하며, 상원을 폐지하고, 당시 유럽공동체로부터 모든 권한을 가져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을 실현하기 위해 토니 벤은 다음 해에 당 부대표에 출마했지만, 현직 부대표인 데니스 힐리(Denis Healey)에게 1퍼센트라는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이후 노동당은 점점 오른쪽으로 갔고, 결국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이라는 수정주의로 전환했다. 덕분에 노동당은 웨스트민스터와 다우닝가 10번지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실패하긴 했지만, 토니 벤의 시도는 노동당을 영국에 사회주의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동원의 매개로 변화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때 노동당의 변화란, 당이 사회주의적 지향을 분명히 하고 당내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것이었다. 이런 변화를 가로막은 것은 ‘의회주의’와 이미 기성의 일부로서 정치계급이 되어버린 의원단과 (우파와 중도파의) 지도부이다. 이런 시도는 대처 집권에 맞서 급조된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더 오랜 기원이 있다. 바로 1960년대 신좌파,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 핵무기 폐지 운동, 여성 운동, 일반화된 참여민주주의의 이상 등이다.

이런 흐름으로 볼 때 코빈은 분명 노동당 내 좌파의 적자라 할 수 있다. 블레어 시절 폐기된 노동당 당헌 4조(국유화 조항)의 부활 약속을 상징으로 하는 주요 산업 국유화, 대학등록금 폐지, 핵잠수함 현대화 반대 및 핵무기 폐지, 민중적 양적 완화 등 말 그대로 ‘사회주의적 지향’과 ‘반긴축’을 내걸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당내 민주주의의 확대 및 사회운동의 활성화를 또 다른 목표로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인격

 

전통은 끊임없이 변주된다. 아니 그럴 때에만 전통을 형성할 수 있다고 할 때 제레미 코빈의 특유함은 주목할 만하다. 의회정치라는 기준으로 보면, 그는 평범한 백벤처(backbencher)이자 그림자 내각에도 들어간 적이 없는 노동당 의원이다. 그는 카리스마가 강한 연설가가 아니며,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인물이다. 또한 명문대 출신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닌, 그러니까 오늘날 노동당 의원 다수와 지도부를 구성하는 인물들의 서클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이유로 선거 초기에 대다수 언론은 그를 그리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런데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고 말하는 그에게 수많은 젊은이들이 열광했다. 전임 당 대표인 에드 밀리반드(Ed Miliband)가 총선에서 끌어오겠다고 한 그 사람들이 에드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이 평범한 정치가에게 몰려든 것이다. 평범한 분석이지만, 이 평범한 사람의 진실함, 감수성, 열정에 끌렸을 것이다. 코빈은 1949년 생으로, 6.8세대라 할 수도 있고 포스트 6.8세대라고도 할 수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2년간 해외 봉사활동을 하고, 공공노조와 섬유노조의 상근자로 사회활동을 시작한 코빈은 1974년에 런던 해링게이(Haringey) 지방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정치가가 되었다. 1981년에는 토니 벤을 지지했고, 런던 이즐링턴(Islington) 지역구 서기로 선출되었다. 이후 1983년에 런던 이즐링턴 노스(Islington North)에서 의원으로 당선된 이래로 지금까지 지역구를 지키고 있다.

제레미 코빈

제레미 코빈

의원으로서의 코빈은 ‘5백 번 이상’이나 당의 결정과 반대되는 표결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그는 이를 “양심에 따른” 것이라 말한다. 그의 양심과 감수성은 포스트6.8 혹은 포스트신좌파의 지향을 여러 모로 드러내는 그의 활동과 태도에서 더 잘 드러난다. 그는 1970년대 중반 아일랜드공화군(IRA)의 테러사건 용의자로 몰린 사람들을 위해 일했고,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했으며, LTGB의 권리를 옹호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 항의했다. 개인적으로 그는 스무 살 때부터 채식주의자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건 돼지 농장에서 일한 경험에서 나온 판단이었다.

이렇게 평범하지만 우리 시대 좌파의 윤리적 기준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코빈은 수많은 젊은이들과 지지자들을 모을 수 있었다. 또한 그는 평범한 선거운동을 벌였다. 지난 30년간 영국의 선거운동은 이른바 선거 전문가들이 기획한 일종의 조작화된 활동이었다. 이른바 포커스 집단을 설정하고, 메시지 선정을 분명하게 하며, 상대방의 발언을 즉각 반박하는 팀을 운영하고, BBC 뉴스 시간에 맞추어 연설을 하는 등등 안무하듯 선거운동 판을 기획했다. 코빈은 이를 정반대로 뒤집었다. 그는 BBC 뉴스 시간을 무시하고 런던시민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옥외유세를 벌였다. 내용적으로도 상대 후보에 대한 인격적 공격과 네거티브 공세는 전혀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정책과 계획을 알리는 데만 집중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그를 위해 일하러 왔다. 선거운동 기간 동안 16,241명의 자원봉사자가 코빈을 도왔다.

 

상황

 

코빈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탄력을 받은 때는 7월 초에 주요 노조들이 그를 지지하기로 결정하면서부터이다. 그런데 이 일은 꼭 코빈이 잘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초기에 노조들은 버넘을 대안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좌파 후보로 보이는 것을 두려워했던 버넘은 이들의 지지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노조의 지지가 코빈에게 간 것이다.

노동당 내 주류의 이런 감수성과 태도는 선거운동 기간 중에 있었던 의회 표결에서도 나타났다. 보수당 의원이자 노동과 연금부 장관인 이아인 던컨 스미스(Iain Duncan Smith)가 발의한 대표적인 긴축 법안인 ‘복지 개혁과 노동법’에 대해 노동당 지도부는 기권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코빈은 다른 47명의 노동당 의원과 함께 반대표를 냈다. 물론 버넘을 비롯하여 이번 노동당 대표 선거에 나선 다른 세 명은 지도부의 지시대로 기권을 했다.

59.5퍼센트 득표의 압도적인 비율로 당선된 제레미 코빈

 

이런 모습은 이후 노동당의 집권 전망과 관련해서 ‘중앙으로 가야 하는가, 아니면 왼쪽으로 가야 하는가?’라고 묻는 전통적인 질문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블레어 등은 전통적인 질문에 맞는 인습적인 대답을 한 셈이다. 하지만 이번 당 대표 선거가 있게 한 지난 총선 결과, 그리고 이런 결과를 낳은 상황은 좀 다른 그림을 그리게 한다.

 

지난 5월에 있었던 총선에서 노동당은 전체 650석 중에서 232석을 얻었고, 보수당은 330석을 얻어 예상과 달리 과반을 확보했다. 하지만 득표율을 보면 보수당 36.8퍼센트 대 노동당 30.5퍼센트이다(영국은 악명 높은 소선거구제이다). 이는 이전 총선에서 얻은 득표보다 각각 0.8퍼센트와 1.5퍼센트를 더 얻은 결과다. 득표율로만 따지면 어느 당도 이전보다 나아진 결과물을 얻지 못했다. 나머지 유권자는 스코틀랜드 국민당(4.7퍼센트), 자유민주당(7.9퍼센트), 영국독립당(12.7퍼센트), 녹색당(3.8퍼센트) 등에 표를 던졌다. 이런 결과는 영국이 여전히 강고한 양당체제를 유지하고 있지만, 스페인, 그리스,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정치’의 징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저 중앙으로 가는 것만으로 집권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제레미 코빈이 부상한 이유는 그의 “분명한 반긴축 정책”이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2008년 이후 지속된 경제위기 속에서 진행된 긴축 정책에 대한 반감이 코빈이라는 인격 속에서 집중점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 입장은 다르지만 로버트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 같은 학자도 코빈의 경제 정책을 긍정적으로 검토한다. 이에 비해 이번 당 대표 선거에 나섰던 나머지 세 후보나 토니 블레어 같은 인물은 밑에서 끓고 있던 이른바 민심을 전혀 다른 식으로 읽었다고 할 수 있다. 하기야 그들은 ‘제3의 길’의 성공과 엘리트 정치가에 대한 믿음으로 너무나 거만해져 있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알고 있듯이 코빈이 당 대표가 된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토니 블레어가 한 말 중에 가장 그럴듯한 것이 “나라를 바꾸는 것보다 당을 바꾸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이다. 이미 노동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당 대표 코빈에 대한 일종의 보이콧 움직임이 있다. 물론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었기 때문에 당장 코빈의 지도력이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목표가 자신의 말처럼 현재의 노동당으로 집권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당을 사회운동으로 전환하는 것이라면, 가야 할 길이 멀고 험난하다. 이것이 노동당을 ‘복원’하는 것이건, ‘갱신’하는 것이건,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 것이건 간에 새로운 사회운동적 기반이 필요하다면 거쳐야 할 연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