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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좌파 이웃 좌파 ⑯ 보수와 석유의 장기 지배에 마침표를

22호(2015년 7월) 먼 좌파 이웃 좌파 ⑯

보수와 석유의 장기 지배에 마침표를

캐나다 앨버타 주 선거

 

장석준 _ 기관지위원

 

 

 

올해는 유독 여러 나라에 굵직굵직한 선거가 많다. 최근 몇 주만 봐도 그렇다. 5월 24일 스페인에서 지방선거가 있었다. 며칠 뒤인 6월 7일에는 터키가 총선을 치렀다. 스페인에서는 포데모스를 비롯한 여러 좌파 세력들이 결성한 선거연합이 양대 도시,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집권에 성공했다. 터키에서는 피억압 소수민족 쿠르드인들과 좌파, 여성운동, 성소수자운동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신생 좌파정당 인민민주당(HDP)이 단번에 10% 넘게 득표하며 주요 야당으로 부상했다. 지중해 서쪽 끝과 동쪽 끝에서 모두 거센 변화의 바람이 일었다.

이 두 선거 소식에 가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또 다른 대륙에서도 비슷한 돌풍이 불었다. 5월 5일에 캐나다의 앨버타 주는 주의회 선거를 실시했다. 캐나다는 중앙정부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도 내각책임제를 따른다. 주의회 다수당이 주정부를 구성하고, 다수당 대표가 주지사(정확히는 주총리) 역할을 맡는다. 이번 선거는, 미국식으로 표현하면 앨버타 주지사 선거였던 셈이다.

신민주당 로고

신민주당 로고

그런데 선거 결과가 놀라웠다. 앨버타에서는 지난 44년 동안 쭉 ‘앨버타 진보보수연합’(참 요상한 이름인데, 성격은 그냥 ‘보수당’이다)이 여당이었다. 그 전에도 이 주에서는 비슷한 성격의 보수정당들이 장기 집권했다. 그래서 앨버타는 캐나다에서 흔히 보수의 아성으로 통한다. 오죽 하면 ‘캐나다의 텍사스’라고 하겠는가. 하지만 이 역사는 올해로 끝나고 말았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신민주당(New Democratic Party, NDP)이 40.57%를 득표하며 집권당이 됐기 때문이다(총 87석 중 54석 – 소선거구제라서 득표율과 의석이 비례하지 않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신민주당이 지난 2012년 선거에서는 9.82%를 득표하며 4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는 점이다. 신민주당이 이미 집권한 바 있는 온타리오 주 등 캐나다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앨버타에서 이 당은 만년 소수정당에 불과했던 것이다. 한데 불과 3년만에 주의회에서 안정 다수를 확보한 강력한 집권당으로 도약했다. 어떻게 이런 약진이 가능했을까?

 

미국과는 다른 길을 걸은 캐나다 그리고 NDP

 

앨버타의 정치 격변을 살피기 전에 먼저 짚어볼 게 있다. 캐나다의 정치 지형과 신민주당의 역사다. 캐나다는 이웃 나라 미국과 마찬가지로 각급 선거의 선출 방식이 다 소선거구제다. 신생정당이 기존 거대정당들의 틈을 비집고 성장하기 쉽지 않은 조건이다. 따라서 캐나다의 정치 지형도 미국과 같은 양대 보수정당 독점 체제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오랫동안 그래왔다. 보수당(앨버타의 지역정당인 진보보수연합과는 다른 정당이며 미국의 공화당에 가깝다)과 자유당(미국의 민주당 격)이 정치권을 양분해온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는 확연히 다른 게 있다. 미국은 양대 보수정당의 지배가 철옹성인 데 반해 캐나다는 그렇지 않다. 캐나다의 보수당-자유당 양당 체제는 수십 년 전부터 조금씩 균열을 보였다. 그 균열의 한 쪽 출발점은 퀘벡 주다. 프랑스어 사용 인구가 다수 거주하는 퀘벡 주에서는 1960년대부터 좌파 성향의 분리주의 세력이 급성장했다. 그래서 이제 퀘벡에서는 영어 사용 인구가 주도하는 중앙정치의 정당 구도가 먹히지 않는다.

균열의 또 다른 출발점은 전국적인 제3당 신민주당의 등장이다. 비록 당명은 우파인지 좌파인지 헷갈리지만, 신민주당은 영국 노동당처럼 노동조합운동의 조직적 지지에 바탕을 둔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다. 이 당이 등장하고 성장한 것이야말로 캐나다 현대사가 미국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다.

실은 그 전에도 캐나다에는 여러 좌파정당들이 있었다. ‘노동당’이라는 정당도 있었고, 진보적 성격의 농민정당도 있었다. 대공황 직후인 1932년에는 이들 정당이 ‘협동공화연맹[노동-농민-사회주의](Co-operative Commonwealth Federation[Farmer-Labour-Socialist], CCF)’라는 독특한 이름의 새 정당으로 통합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는 사회당과 공산당의 지지 기반이 뉴딜을 계기로 민주당에 흡수된 데 반해 캐나다에서는 협동공화연맹이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좌파 독자정당 노선을 꿋꿋이 견지했다(1945년 총선에서 총 245석 중 28석을 획득한 게 최대 의석이었다).

신민주당의 전신인 협동공화연맹의 포스터

신민주당의 전신인 협동공화연맹의 포스터

이 협동공화연맹이 확대 재창당한 게 바로 지금의 신민주당이다. 1961년에 노총인 ‘캐나다 노동회의(Canadian Labour Congress, CLC)’가 정당운동에 동참하기로 결정하면서 협동공화연맹과 노동회의는 새 정당, 신민주당을 출범시켰다. 이렇게 노총이 적극 합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민주당은 중앙정치 무대에서는 여전히 소수정당이었다. 협동공화연맹 시절과 마찬가지로 연방의회에서 수십 년 동안 전체 의석의 10% 수준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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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주당 창당의 주역이자 캐나다 전 국민 의료보헙 도입의 선구자 토미 더글러스

하지만 신민주당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주정부 수준의 지역정치를 중요한 돌파구로 삼았다. 그 최초이자 대표적인 사례가 창당 주역 토미 더글러스(초대 대표)가 이끈 서스캐처원 주정부였다. 서스캐처원 주의 신민주당 정부는 1962년에 북아메리카에서 최초로 전 주민 의료보험을 도입했다. 이에 반대하며 의사 파업까지 벌어졌지만, 주정부는 공공의료보험제도를 당당히 관철시켰다. 이를 계기로 결국 1970년대에 캐나다 전체에 전 국민 의료보험이 실시됐다. 이것이 오늘날 미국과는 전혀 다른 캐나다 공공의료 체계의 탄생사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영광스러운 주인공이 바로 신민주당이다.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식코(Sicko)》에도 얼핏 이 내용이 나온다. 책으로는 데이브 마고쉬가 쓴 토미 더글러스의 전기인, 《또 다른 사회는 가능하다 : 토미 더글러스는 어떻게 자본과 권력을 넘어 무상 의료를 이루어 냈는가?》[김주연 옮김, 낮은산, 2012)]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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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주당 주정부의 전 주민 의료보험 도입에 반대한 의사 파업

이런 오랜 노력은 2011년 총선에서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 2008년 금융 위기의 여파 속에 실시된 이 선거에서 신민주당은 총 308석 중 103석을 획득하며 자유당을 제치고 제2당으로 부상했다. 보수당-자유당의 양당 구도가 깨지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후 자유당이 다시 지지율을 늘려 현재는 보수당, 자유당, 신민주당이 여론조사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신민주당이 1위를 기록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 이 당의 성장은 어느 정도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올해 10월에 있을 캐나다 총선 결과가 주목된다.

물론 다른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신민주당도 요즘 많은 비판을 받는다.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해 수세적 입장을 취해왔기 때문이다. 온타리오 주 등에서 집권했을 때는 이 당을 지지한 사회운동 세력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러나 어쨌든 어려운 제도 여건 속에서도 반백년의 노력 끝에 보수정당 독점 체제를 보수 대 진보 구도로 바꿔낸 것은 놀라운 성취임에 분명하다. 비슷한 상황에 있는 우리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앨버타 선거, 보수-석유 카르텔에 맞선 승리

 

다시 앨버타 선거로 돌아가자. 앨버타가 ‘캐나다의 텍사스’라 불린다고 했는데, 이는 단지 보수정당의 거점이어서만은 아니다. 앨버타는 텍사스처럼 석유 산지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가스와 오일샌드(원유를 10% 이상 함유한 지질층으로서, 다량의 물을 분사해 석유를 추출한다)의 매장지다. 이들 천연자원을 채굴하는 에너지 기업들이 앨버타 경제를 좌우한다. 보수정당의 장기 집권과 석유기업들의 경제적 지배, 이것이 이제껏 앨버타 주를 이끌어온 두 기둥이라 할 수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은 “석유 경제의 성장 = 앨버타의 발전”이 대다수 주민들의 상식이었다. 덕분에 보수-석유 카르텔은 별 도전 없이 권좌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이러한 상식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앨버타도 북아메리카의 다른 지역들처럼 2008년 금융 위기로 타격을 입었다. 금융 위기 이후에는 국제원유가가 하락했다. 석유산업에 의존해온 앨버타 경제로서는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더구나 그간 석유기업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앨버타 주는 캐나다에서 법인세가 가장 낮았다. 가뜩이나 세원이 제한되어 있는데 석유산업 경기마저 추락하니 당장 재정 위기가 닥쳤다. 2009년 주정부는 수십 년만에 처음으로 50억 달러의 재정 적자를 기록했다.

유가 하락과 함께 앨버타 주민들의 ‘석유 경제 신화’도 붕괴했다. 석유 덕분에 잘 사는 게 아니라 (제3세계 산유국들과 마찬가지로) 이로 인해 앨버타의 경제와 사람들의 삶이 왜곡돼왔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오일샌드에서 원유를 추출하기 위해 토양과 수질을 엄청나게 오염시키고 있다는 사실도 직시하게 됐다. 그런데도 진보보수연합은 이제껏 해오던 대로 석유기업들의 눈치만 봤다. 사람들은 대안을 찾기 시작했다.

앨버타 주 총리로 당선된 신민주당의 레이첼 노틀리

앨버타 주 총리로 당선된 신민주당의 레이첼 노틀리

앨버타 주에서 만년 소수정당이던 신민주당이 감히 그 대안의 역할을 떠맡고 나섰다. 사실 1961년에 신민주당 창당대회가 열린 곳은 앨버타에 속한 도시 캘거리다. 하지만 보수정당의 텃세 때문에 앨버타는 한동안 신민주당의 성장과는 인연이 먼 곳이었다. 그러던 것이 작년에 새로운 인물이 주당(州黨) 대표로 선출되면서 급변하기 시작했다. 변호사 출신의 여성 정치인 레이첼 노틀리(1964년생)가 그 주인공이다. 앨버타에서 신민주당 조직을 처음 만드는 데 앞장선 고(故) 그랜트 노틀리의 딸인 레이첼은 70%의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주당 내 세대교체를 성공시켰다. 신임 대표를 얼굴로 내세운 신민주당은 앨버타에 필요한 새 정치의 상징으로 급부상했다.

 

이번 선거에서 앨버트 주 신민주당은 보수-석유 카르텔을 정면 공격하는 정책들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석유산업과 그 수혜자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여 복지를 확대하고, 석유기업들을 규제해 기후변화 대응에 힘을 쏟겠다는 것이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법인세를 10%에서 12%로 인상한다.
– 고소득자와 부유층에 누진세를 부과한다.
– 석유 및 천연가스 기업들의 유전 사용료 인상을 검토한다.
– 2018년까지 최저임금을 시간당 15달러로 인상한다.
– 미국과 연결된 천연가스 수송관의 증설에 반대한다.
– 오일샌드의 원유 추출로 인한 환경오염을 중단하고 원상회복시킨다.
–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온실가스 배출을 규제한다.
– 공공운수에 적용할 이산화탄소 포집 기술 개발을 지원한다.
– 보건, 교육, 사회복지 지출을 늘린다.

 

보수-석유 지배 체제에 실망한 민심은 신민주당의 이런 공약에서 대안을 발견했다. 이것이 신민주당의 득표율이 네 배 이상 늘어난 가장 기본적인 이유였다. 선거 결과가 나오기 전에 혹자는 진보보수연합으로부터 이탈한 표심이 또 다른 우파 지역정당 들장미당(Wildrose Party)으로 향하리라 내다보기도(또는 기대하기도) 했었다. 들장미당은 실제로 2012년 선거에서 30% 넘게 득표한 저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대중은 진보보수연합보다 더 보수적인 들장미당(미국의 티파티에 가깝다고 한다)이 아니라 신민주당을 선택했다. 이번 선거의 심판 대상은 단순히 진보보수연합만이 아니라 그 배후의 기존 경제-사회 패러다임이었던 것이다.

 

앨버타 선거가 보여준 것 – 변화는 가능하다

 

물론 지난 몇 달 동안 그리스에서 다시 확인한 것처럼, 선거 승리의 환희는 짧고 신임 좌파 정부의 책임은 무겁기만 하다. 이것은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집권한 앨버타 주도 마찬가지다. 벌써부터 보수 언론은 신민주당의 공약들을 하나하나 무력화시키려고 벼르고 있다. 그 배후에는 물론 석유자본이 있다. 레이첼 노틀리의 새 주정부는 과연 이러한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온타리오나 퀘벡의 좌파 주정부가 그랬듯이 결국 애초의 약속들을 포기하고 투항할 것인가, 아니면 세계인들이 지금 그리스나 스페인에 기대하는 것과 같은 사회 세력 관계의 변화에 나설 것인가?

결말은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전에 일단 높이 평가하고 주목해야 할 게 있다. 다름 아니라 앨버타와 캐나다 전체에서 신민주당이 성공시킨 역사적 도전이다. 이들의 승리는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이면서 가장 절실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해준다.

첫째,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어떠한 낡은 경제-사회 패러다임도 결국에는 변화한다는 것. 둘째, 신생 좌파정당이 보수 독점 정치체제를 바꾸는 게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것. 셋째, 위의 두 사실은 밀접히 연관된다는 것, 다시 말해 정당 정치의 변화는 기존 경제-사회 패러다임이 흔들리고 무너지면서 실현된다는 것. 이것이 앨버타의 드라마가 우리에게 전하는 첫 번째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