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문제, 제재보다 전략이 필요하다

[2016.03 제29호 특집]

북핵 문제, 제재보다 전략이 필요하다

 

 

북한이 제4차 핵실험에 이어 장거리 로켓 발사를 강행했다. 한국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 개성공단 전면 폐쇄라는 초강수의 제재를 단행했다. 이렇듯 남한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가 예상되는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를 북한이 강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대응에 숨은 의도는 무엇일까?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일본 공산당 당사 벽면에 게시된 아카하타 신문

먼 좌파 이웃 좌파 ④ 동병상련? 이웃 나라 일본의 좌파 (2)

[2013.11 제3호 먼 좌파 이웃 좌파 ④]

동병상련? 이웃 나라 일본의 좌파 (2)

 

장석준|부대표

 

 

 

노동조합총평의회의 배타적 지지로 존립 유지돼

 

“5만 당원으로 천만 표를 모으는 불가사의한 당.” 한 정치학자는 일본 사회당을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실제로 사회당 당원 수는 원내에 다수 의석을 확보한 좌파 대중정당 치고는 너무나 적었다. 1969년 당원 재등록 기간 중에 확인된 당원 수는 고작 3만 명이었다. 이중 5천 명 가량이 국회의원과 지방의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회당에는 간부만 있고 당원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회당이 존립하고 또한 제1야당으로 버틸 수 있었던 요인은 단 하나, 바로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 ‘일본의 민주노총’ 이라 할 수 있었다)의 배타적 지지였다. 총평은 선거 기간 중에 사회당의 자금과 조직 동원을 떠맡았다. 대신 사회당 국회의원 대부분은 총평 간부 출신이었다.

일본의 노총인 연합(렌고)의 실내 집회 모습

일본의 노총인 연합(렌고)의 실내 집회 모습

사실 좌파정당이 노동조합과 긴밀할 관계를 맺는 것 자체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느냐가 문제다. 일본의 노동자들은 당에 대거 개별 입당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사회당에 영국 노동당 식의 노동조합 집단입당제도가 존재한 것도 아니었다. 오직 총평 간부들만 사회당에 입당하고 당과 관계를 맺었다. 비록 총평 간부들이 급진적 성향을 지녔다고는 해도 이렇게 의원과 의원 지망자, 노조 간부들로만 이뤄진 좌파정당이 오래도록 건강하게 발전하기란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일본의 노조는 산별이 아닌 기업별이었다. 일본 노조 운동은 조직률이 50%를 넘던 전쟁 직후의 전성기에 산별로 전화하는 데 실패했다. 기업별 노조체제가 정착되었다. 그 결과,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대기업 중심의 기업별 노조 체제 바깥에서 계속 미조직 상태로 머물고 말았다.

이런 노동조합운동의 한계는 고스란히 사회당의 한계로도 다가왔다. 대기업 노동조합은 점점 우경화했고, 그러면 그럴수록 사회당은 총평 산하 일부 전투적 공공부문 노동조합만의 노동자정당이 되어갔다. 그리고 대다수 미조직 노동자에게는 ‘남의 당’ 이었다. 이런 사회당을 국민들이 수권능력을 갖춘 당이라고 볼 리 만무했다. 사회당은 언제인가부터 자민당의 지나친 횡포를 견제할 순단일 뿐이었다.

 

총평 의존 정당이었던 일본 사회당

 

이런 상황에서 총평계 노동운동의 위기가 닥쳤다. 1980년 중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자민당은 기존의 일본형 케인스주의를 시장지상주의적 긴축 재정으로 전환하면서 동시에 노동계를 손보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1987년에 ‘국철(國鐵) 개혁’ 이라는 구호 아래 철도 사유화를 단행했다. 총평의 핵심인 공공부문 노동조합을 깨기 위한 조치였다.

같은 해에 민간 대기업 노조의 우경화한 분위기를 대변하는 새로운 총연맹 렌고(連合, 일본노동조합연합)가 800만 조합원을 자랑하며 출범했다. 2년 뒤에는 총평이 결국 해산하고 렌고에 흡수 통합됐다. 렌고의 노선은 총평의 정반대라고 보면 된다. 노동조합에 의존해온 사회당으로서는 이제 렌고에 맞춰 자신도 오른쪽으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신세가 되었다. 노조운동의 우경화와 함께 노동자들의 사회당 지지율도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사회당은 나름의 자구 노력을 벌였다. 시민운동 출신의 여성 정치인 도이 다카코를 대표로 내세운 것도 그 일환이었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인지 1989년 참의원(상원) 선거와 1990년 중의원 선거는 사회당이 오랜만에 약진하는 의외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사회당의 득표율이 다시 20%를 넘어섰다. 그러나 사회당의 약진은 오히려 당을 궁지에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다. 사회당에 표를 빼앗긴 소수 정당들(대표적으로 공명당)이 자민당과 유착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보수 세력 주도 정계개편에 시동이 걸렸던 것이다. 렌고는 이를 부채질하는 역할을 했다. 렌고는 “사회민주주의와 리버럴 세력의 총결집(이른바 ‘사민-리버럴 정당’론)”을 주장하며 노골적으로 좌파정당인 사회당을 해체하고 중도정당을 건설하라고 요구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2012년 한국 대선의 이른바 ‘빅 텐트’ 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자민당에서 떨어져 나온 일본신당, 신생당 등 보수 계열 신당이 대거 선거에 참여한 93년 7월 중의원 선거는 사회당 붕괴의 신호탄이 되었다. 사회당의 의석은 136석에서 70석으로 절반이 줄었다. 당의 오른쪽에서나 왼쪽에서나 똑같이 대규모 이탈이 나타났다. 렌고 소속 노조 지도부는 사회당이 너무 왼쪽에 있다며 사회당이 아닌 보수 신당들을 지지하기로 결의했다. 반면 기존 사회당 지지자 중에서 38.9%만이 사회당을 지지하고 나머지는 대거 이탈했는데, 이 중에는 좌파 성향 유권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사회당의 와해가 시작된 것이다.

총선 직후 렌고 지도부의 압력으로 일본신당의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주도하는 최초의 비자민당 연립정부가 들어섰다. 이 연정에 사회당도 무라야마 토미이치 신임 위원장이 입각했고 한때 무라야마가 총리가 되기도 했다. 겉만 보면, ‘집권’ 이고 ‘성공’ 이었다. 하지만 공동 집권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자민당에서 탈당한 보수 정파들이었다. 보수파와의 공동 집권은 사회당의 정체성 위기만 가중시켰다. 사회당의 영혼이 사라진 그 자리에서 더 이상 대중적 좌파 구심은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 사회의 총보수화가 시작된 것이다.

 

총보수화의 시작이 된 보수파-사회당 공동 집권

 

지금 일본의 좌파 정치 공간은 초토화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회당은 1996년 1월 사회민주당(약칭 사민당)으로 당명을 바꿨다. 이때 좌파 일부는 탈당해 신사회당이라는 소규모 정당을 따로 차렸고(지방의원은 있으나 아직까지 원내 의석은 없다), 48명의 우파 의원은 렌고의 권유에 따라 신생 중도우파 정당인 민주당에 합류했다. 사회당의 전통은 사민당으로 이어졌지만, 사실상은 기존 사회당의 붕괴였다.

사민당은 소선거구-비례대표 병립제가 처음 실시된 96년 중의원 선거에서 16명의 당선자를 냈다. 비례대표 선거에서는 공산당이 13%를 얻는 데 반해 6%만을 얻었다. 사민당은 초기에도 그래도 도이 다카코 위원장의 인기에 의지해 근근이 버텼지만 도이가 물러난 뒤에는 계속 당세가 추락하고 있다. 작년 중의원(총480석)선거에서는 정당 투표 2.38% 득표로, 2개의 의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물론 공산당이 버티고 있다. 일본 공산당은 현재 자민당보다 더 많은 지방의원을 보유하고 있다. 중의원 선거에서는 정당투표 6.17% 득표로 8석을 확보했다. 일단 선방이었다. 그러다가 올해 도쿄도(都) 지방선거에서는 의석을 8석에서 17석으로 늘리며 상승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7월의 참의원(총242석) 선거에서는 기존 의석 6석에서 5석을 더하는 결과를 얻었으며, 더 중요한 것은 지역구 당선자를 배출했다는 사실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비록 자민당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치이지만 6% 정도의 지지율을 보이며 유일 좌파 야당이자 제1야당의 위상을 인정받고 있다.

자유민주당의 헌법 96조 개정에 반대하는 일본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공동 시위

자유민주당의 헌법 96조 개정에 반대하는 일본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공동 시위

사회당이 붕괴하고 ‘사민-리버럴 정당’ 민주당마저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한 공간을 공산당이 채워나가고 있는 셈이다. 공산당이 그나마 버티고 있으니 다행이다. 하지만 워낙 사회당, 공산당, 신좌파 사이의 분열과 대립이 심했던 터라 공산당이 과연 진보적 여론 전체의 새로운 대변자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최근 일본 공산당의 정책에 대해서는, 시이 가즈오 위원장의 연설문들을 모은 『지금, 일본 공산당』[이매진, 2013]을 참고할 수 있다.)

아무튼 일본 좌파정당의 역사를 보면 볼수록 저들이 20세기 후반에 보인 여러 패착이 한국 진보정당운동에서 지난 2-3년 동안 집약적으로 반복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두 나라의 진보좌파 모두 지금 그 폐허를 수습하고 새 출발을 모색해야 하는 처지다. 동변상련, 이것이 지금 두 나라 진보좌파를 가로지르는 열쇳말이다.

아직도 간혹 볼 수 있는 신좌파 집회

먼 좌파 이웃 좌파 ③ 이웃 나라 일본의 좌파 (1)

[2013.10 제2호 먼 좌파 이웃 좌파 ③]

이웃 나라 일본의 좌파 (1)

 

장석준|부대표

 

 

 

실종된 동아시아 국제연대의 전통

 

좌파 정치의 오랜 미덕 중 하나는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국제연대의 전통이다. 동아시아에도 20세기 전반에는 이런 전통이 살아 있었다. 우리 항일혁명운도사만 봐도 중국, 일본의 좌파와 연대하여 동아시아 전체의 변혁을 위해 싸운 선배들의 기록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좌파 정당들은 자국 정치의 맥락 안에 갇혀 있을뿐더러 교류도 활발하지 않다.

더구나 동아시아가 점점 더 지구 자본주의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데 반해 이 지역의 좌파정치는 오히려 과거보다 쇠퇴하는 양상이다. 무엇보다 점점 더 우경화하는 일본 정치가 그런 인상을 던져준다.

 

오래된 일본의 좌파 정치의 역사

 

일본은 본래 뿌리 깊은 좌파 정치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1920년대에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의 성장을 바탕으로 좌파 대중정당들(흔히 ‘혁신정당’ 이라 불렸다)이 활발하게 등장했다. 사회민중당, 일본사회당 그리고 노동자농민당이 그런 정당들이었다. 남성 보통선거제가 도입된 덕분에 이들 정당은 의회에 진출해 활동하기도 했다. 조지 O. 타튼의 『일본의 사회민주주의 운동』[한울, 1997]을 보면, 당시 이들의 활동상을 생생히 접할 수 있다. 다만 공산당만은 철저히 탄압 받았다. 천황제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패전 이후 한 동안은 좌파 정치의 전성기였다. 전쟁 전의 혁신정당 흐름들이 결집해 사회당을 창당했고, 공산당도 드디어 활동의 자유를 얻었다. 우파가 전쟁 책임을 지고 있었던데다가 패전 후 비약적으로 성장한 대중운동 덕분에 사회당, 공산당 모두 전에 없던 인기를 누렸다. 1947년에는 사회당의 가타야마 데쓰 총리가 이끄는 좌우연정이 들어서기도 했다.

1960년대 신좌파 학생들의 가두 투쟁 모습

1960년대 신좌파 학생들의 가두 투쟁 모습

이 시기를 다룬 책으로는 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 :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일본과 일본인』[최은석 옮김, 민음사, 2009]이 좋다.

이 짧은 전성기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냉전 체제가 자리 잡으면서 곧 끝나버렸다. 하지만 이후에도 한동안 좌파는 일본 사회의 무시할 수 없는 주요 축이었다. 원내에서는 사회당이 늘 1/3 이상의 의석을 점하며 자유민주당의 냉전 드라이브를 막았다. 노동조합운동도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전투적 기풍을 견지했다. 무엇보다 1950년대-60년대 내내 학생운동이 활발히 지속됐고 그래서 좌파 청년 세대가 끊임없이 배출됐다.

 

지나친 총평 의존 속에 조로한 일본 사회당

 

문제는 좌파 전반의 부족(部族)화에 있었다. 여기에는 주류 좌파의 책임도 있었고, 신좌파 세대의 문제도 있었다. 우선 사회당은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약칭 총평)의 배타적 지지 방침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거 때마다 노동자들의 몰표를 받기는 해지만, 당 자체의 기반은 극히 취약했다. 제1야당임에도 불구하고 당원 수는 전성기이던 1960년대 말에 3만 명에 불과했다. 굳이 당원을 확대하지 않아도 총평이 조직과 재정을 책임져줬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 내 좌파, 그 중에서도 ‘사회주의협회’ 라는 정파가 당의 골간을 장악했는데, 그들은 낡은 교조적 마르크스주의를 추종했다. 사회주의협회의 노선은 일본 자본주의의 발전 상황과도 맞지 않았고 신좌파 청년들에게도 별로 매력이 없었다. 그래서 서유럽의 신좌파 세대가 1970년대를 거치며 주류 좌파 정당에 입당해 당 내 좌파 흐름을 강화한 것과 달리 일본에서는 사회당이 조로(早老)해 버리고 말았다. (사회당을 포함해 전후 일본 정치 전반에 대한 개론서로는, 야마구치 지로 외, 『일본 전후정치사』[박정진 옮김, 후마니타스, 2006]이 좋다.)

 

스탈린주의의 유산, 공산당의 자폐성과 신좌파의 정파주의

 

한편 공산당 역시 자폐적 성격이 강했다. 공산당은 한국전쟁 시기에 농촌 게릴라 전술을 추진해 일본사회에서 고립된 적도 있지만, 이후 ‘인민적 의회주의’ 라는 이름 아래 대중 정치의 길을 꾸준히 개척해왔다. 사회당과는 달리, 일간지 <아카하타(赤旗)>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조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산당은 스탈린주의를 부정하기는 했지만 스탈린주의의 어떤 요소들, 가령 ‘무오류의 전위정당’ 신화를 버리지는 못했다. 그래서 과거 일본 공산당이 범한 여러 오류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공산당 정통론을 고집하는 측면이 있다. 국내에도 DVD가 나온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영화 『일본의 밤과 안개』(1960년작)를 보면, 이런 분위기를 실감할 수 있다(한편 참고할만한 책으로는 고야마 히로타케의 <전후 일본의 공산당사 : 당내 투쟁의 역사>[최종길 옮김, 어문학사, 2012]가 있다.) 이런 태도가 공산당과 신좌파 사이의 균열과 대립을 낳았다. 나중에는 아예 서로 폭력을 행사하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이탈리아 공산당이 신좌파와 긴장을 빚으면서도 그 에너지를 흡수해 1970년대에 한때 집권 목전까지 갔던 것 과는 사뭇 다르다.

일본에도 1956년 소련 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의 죄상이 폭로되고 곧이어 헝가리 혁명이 일어나자 공산당에서 이탈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신좌파가 형성됐다. 그 자신 신좌파운동 참여자였던 가라타니 고진은 대답집 『정치를 말하다』[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2010]에서 당시 분위기를 실감나게 전한다. 숫자로만 따지면, 일본의 신좌파 세대도 프랑스나 이탈리아, 서독에 못지 않았다.

흔히 서유럽에 비해 일본 신좌파는 너무 커다란 패배를 겪어서 이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하는데, 사실 패배한 걸로는 서독도 마찬가지였다.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서독 신좌파의 상당수는 1970년대 후반 녹색당 건설 운동에 합류해 대중 정치의 새 흐름을 만들었던 데 반해 일본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가장 커다란 이유는 일본 신좌파 사이에 유독 심했던 정파주의였다. 어찌 보면 공산당의 스탈린주의 문화가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며 등장한 신좌파 세대에게도 고스란히 반복된 셈이었다.

일본 신좌파 정파들 중 하나인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혁마르파 집회

일본 신좌파 정파들 중 하나인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혁마르파 집회

신좌파등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사례이기는 하지만 연합적군파의 아사마 산장 사건을 분석한 퍼트리샤 스테인호프의 『적군파 : 내부폭력의 사회심리학』[임정은 옮김, 교양인 2013]에 그 충격적인 양상이 소개돼 있다. 신좌파 세대가 일본 사회에서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파 간 폭력 사태로까지 치달은 병적인 정파주의(그에 비하면 한국 운동권의 정파주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때문에 세력화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나마 진지하게 방향 전환을 모색한 이들도, 비록 생활협동조합이나 지역운동에 뿌리를 내리기는 했지만, 전국적 정치 흐름을 만들지는 못했다. (신좌파 일부가 생협운동 등으로 전환하는 과정은 요코다 카쓰미, 『어리석은 나라의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시민 : 생활클럽 운동그룹과 풀뿌리 민주주의 운동의 모델 만들기』[나일경 옮김, 논형, 2004]에 잘 소개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에 일본 정치에는 우경화의 쓰나미가 밀려온다. 마치 우리의 지난 몇 년을 연상시키는 사태가 일본 좌파를 덮쳤고, 그 결과가 지금의 우경화한 일본 정치 지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