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_홍진훤2

더 이상 식판 들고 줄 설 수는 없다

[2015.09·10 제24호(합본호) 화요일의 약속]

더 이상 식판 들고 줄 설 수는 없다

‘지금여기’의 사진가, 홍진훤

 

사진·글|현린 편집위원, 문화예술위원장

 

 

 

<화요일의 약속> 연재를 시작하며

일생 동안 우리는 무수히 많은 화요일을 살아왔고 또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 만큼 대개의 사람들에게 화요일은 월요일 다음 날이란 것 말고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날입니다. 그러나 노동당 당원을 비롯한 세계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적어도 두 화요일, 1818년 5월 5일 화요일과 2017년 11월 7일 화요일은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특별한 날입니다.

우선 1818년 5월 5일 화요일. 2백여 년 전 5월의 첫 화요일은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의 기초를 놓은 칼 마르크스가 태어난 날입니다. 어린이날치고는 아주 특별한 어린이가 태어난 화요일이죠. 1925년 조선공산당 건설을 주도한 ‘화요파’의 명칭도 마르크스가 태어난 화요일을 기념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예, 모두 과거의 일들입니다. 그럼 다음 화요일은 어떤가요?

2017년 11월 7일 화요일. 앞으로 2년 후 11월의 첫 화요일은 1917년 10월 혁명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건설 100주년을 기념하는 화요일입니다. 노동당 당원이자 사회주의자인 당신은 이날 어디서 무엇을 하실 계획인가요? 백 년 전 과거를 기념하는 데 머물지 않고, 백 년 후 미래가 기념할 만한 특별한 화요일로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화요일의 약속’, 줄여서 ‘화약’은 2017년 11월 7일 혁명 백주년 기념일을 말 그대로 불(火)의 요일로, 새로운 미래를 위한 기폭제로 만들자는 약속입니다. 《미래에서 온 편지》는 앞으로 매달 화요일, ‘화약’에 동의하는 좌파 문화예술인들을 만나서 그들이 어떻게 이 미래를 살아왔으며 살고 있는지 묻고 듣고 기록해서 독자들에게 배달합니다.

1945년 9월 조선공산당 재건 70주년을 기념하며
2015년 9월, 현린

 

 

지난 6월 이후 문학계의 최대 쟁점이 표절 논란이었다면, 같은 기간 사진계의 최대 쟁점은 사진상 심사의 공정성 논란이었다. 시작은 제2회 ‘최민식 사진상’ 대상 수상자가 이미 내정되어 있었던 것 아니냐, 일부 수상자가 사진상 운영위원 또는 심사위원과 사제지간 아니었느냐는 심사절차에 관한 논란이었다. 그러다 지금은 최민식 사진상이 표방하는 ‘인본주의 다큐멘터리 사진’이란 과연 무엇이냐는 개념 논쟁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최민식이라는 사진가의 인지도와 3천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상금 때문이었는지, SNS에서부터 시작된 논란은 일간지와 사진잡지를 통해 일파만파 퍼져 나갔고, 사진계에 한 발이라도 담그고 있다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보인 청년 사진가들의 반응이 흥미로웠다. 다들 어려운 조건에서 사진작업을 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청년 사진가들은 특별히 더 열악한 환경에 있다. 전업으로 자신의 사진작업을 하는 것은 이들에겐 꿈도 못 꿀 일. 대개는 아르바이트로 생계와 작업에 필요한 돈을 벌고, 각종 공모전이나 지원금 앞에 줄을 설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이들이야말로 이런 사진상 논란에 가장 민감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의외로 이들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청년 사진가 홍진훤의 표현을 빌자면, “분노의 타임라인을 접하고 우리가 내뱉은 일성”은 “우리도 분노하고 싶다!”였다. 하지만 ‘사피아(사진 마피아)’라 불리는 사진권력으로부터 워낙 떨어져 있어서인지 그들로서는 이 논란을 달구는 분노의 근거를 알 수조차 없었다. “사진판이 온통 분노로 뒤덮여 있는데 우리는 무엇에 분노해야 하는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그들로서는 관심을 가지려야 가질 수도 없었고 논쟁에 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 이 논란을 계기로 그들만의 대안을 모색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첫 번째 ‘화요일의 약속’은 사진가 홍진훤과 했다. 우선, 청년 사진가들이 어떤 대안을 모색 중인지 궁금했다. 더불어 디지털 카메라에 이어 카메라폰이 대중화됨으로써 전 국민이 사진작가라는 말도 나오는 시절에, 정작 사진을 업으로 삼는 청년 사진가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화요일의 약속’인 만큼, 9월 가을햇살이 가득했던 어느 화요일, 종로구 창신동 해발고도 70미터에 위치한 대안공간 ‘지금여기’를 찾았다.

 

밥줄로부터의 이탈

 

미래에서 온 편지(이하 미): 요즘 모든 국민이 사진작가라고들 한다. 사진을 업으로 삼는 작가 입장에서 이 말에 동의하는가?

화요일_홍진훤4홍진훤(이하 홍):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작업을 하느냐에 달렸다고 본다. 한국에서 완벽한 전업 작가는 손에 꼽는다. 내게는 프로와 아마추어란 말 자체도 손 오그라드는 말이다. 아무래도 그런 차이는 있다. 사진을 삶의 중심에 두고 고민하고 사는 사람과 사진을 부수적으로 하는 사람의 차이 같은 것. 하지만 작업이 좋으면 된다고 본다.

미: 그런 면에서 사진가 최민식은 특별하다. 그 자신은 주류 사진가가 아니었지만, 많은 사진가들에게 롤 모델이 되어왔다. 또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민식 사진상’이 만들어졌고 그 운영과 심사를 다시 사진계의 주류가 맡고 있다. 이번 논란도 결국 주류와 비주류 사이, 중심과 변방 사이의 권력투쟁이 핵심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작 비주류에 속한다고 할 젊은 사진가들의 반응이 시큰둥하다. 왜 그렇다고 보는가?

홍: 최민식 사진에 빚지지 않은 사진가가 있을까? 지금에 와서 그 사진이 저항적이냐 아니냐 하는 건 별개의 문제이고, 그 시절에 그런 사진(작업)을 올곧게 했다는 점은 기릴 만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민식 사진상’에 공모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최민식의 인본주의 사진철학 운운할 때부터 이건 우리와 상관없는 상이구나 직감했다. 실제로 주변의 젊은 사진가 대부분이 응모조차 하지 않은 걸로 안다. 그리고 첫 수상자가 워낙 전통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가였다. 그 뒤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다 이런 논란이 터졌고, 이 글 저 글 다 읽어 봤다. SNS가 어마어마한 분노로 가득한데 관심을 안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분노의 근거가 없었다. 사진상 운영진이 잘 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이렇게 들고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궁금해서 기자들한테도, 선배들한테도 물어봤다. 자기들끼리 다 해먹는다는 어떤 배제의 역사, 권력의 문제가 쌓이고 쌓여 폭발한 것이라고 짐작만 할 수 있을 뿐, 정확한 사실을 들을 수는 없었다. 우리도 분노해야 할 것 같고 분노하고 싶은데 누구도 우리에게 사실을 알려주지 않으니 그냥 웃다 말고, 비아냥거리다 말 수밖에 없었다.

미: 이 사건을 계기로 대안을 모색하기로 했다고 들었다. 어떻게 시작했고 어디쯤 와있는가?

홍: 이전부터 불만이 쌓여있었다. 논란 발생 후 겸사겸사 젊은 작가들, 기획자들, 기자들이 모였다. 그래서 얘기했던 것이, 그들이 했던 방식대로 그들을 치지는 말자는 거였다. 그건 꼰대 같으니까. 우리는 전혀 다른 지점에서 새로운 걸 해보자고 했다. 처음에는 좋은 사진상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작가들 지원제도를 고칠 수 있는가 함께 고민해봤다. 그런데 이것도 기존 시스템 안에서 헐떡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선은 우리끼리 사진을 존중하고 읽어보기로 했다. 사진은 물론이고 사진에 관한 글이나 사진과 관련된 공간에 관해 읽는 일부터 시작했다. 심사하고 줄 세우는 거 말고, 주기적으로 만나서 자랑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내기로 했다. 끝이 어디일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이 시대에 옆에서 작업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사람은 우리밖에 없다. 그리고 더 이상 식판 들고 줄 설 수는 없다.

 

지극히 사(회)적인 사진

 

미: 본인 사진 얘기를 해 보자. 2009년에 사진비평상 수상작도 그랬고, 2012년 <TAKE LEFT> 전시작도 저널리즘 사진에 가까웠다. 그런데 막상 개인전의 경우, 예컨대 2013년 <임시풍경>이나 2014년 <붉은, 초록>, 그리고 2015년 <마지막 밤(들)>에서는 저널리즘 사진과는 거리가 먼 스타일의 사진들을 전시했다. 어떤 이유가 있는가?

임시풍경 中 (2013)

임시풍경 中 (2013)

붉은, 초록 中 (2014)

붉은, 초록 中 (2014)

홍: 나에 대한 생각의 변화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저널리즘 사진을 보고 자랐고 그렇게 찍는 게 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널리즘 사진은 나랑 맞지 않았다. 나란 사람 자체가 주장 같은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급박한 현장에 적응도 잘 못하고, 순간 포착 같은 것도 못한다. 그런 것에 큰 감흥을 느끼지도 못하고 해서, 대신 현장 주변을 맴돌며 천천히 찍는다.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일치해야겠더라. 멋들어진 사진은 못 찍는다. 내 정서에 맞지도 않는다. 그러다 보니 좀 더 솔직하게, 솔직하게 찍는다. 그렇게 해야 오래 간다. 남들 시선 의식하지 않고, 스트레스 안 받는다.
2013년 첫 개인전을 할 무렵 사진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면서, 내가 말하고 싶은 내용과 방식, 뉘앙스 같은 것들을 사진적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세상이 바뀌어야 돼”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이게 우리가 만든 세상이구나”라며 흔들리는 내 마음을 확인하는 정도? 세상에 악은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 악과 내가 상관이 없다는 얘기는 못하겠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주 나쁘게 살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마어마하게 나쁜 풍경을 담고 싶지는 않다. 숨겨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 정도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

미: 홍진훤의 사진은 무척 개인적인 풍경으로 보이는데, 그 앞에 서면 늘 사회적인 풍경과 마주치게 된다. 의도한 것인가?

홍: 내가 사회에 관심이 많아서 내 이야기를 해도 자연스럽게 사회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싶다. 내 삶이 사회와 분리되지 않는 이상, 내가 관심의 끈을 놓지 않는 이상,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사회적인 이야기는 계속 나온다고 생각한다. 현장에 줄기차게 나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런 식으로 내 이야기를 통해 사회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남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특별한 기사거리를 만들고자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작업이 철저하게 사회적으로 작동하기를 원한다.

마지막 밤(들) 中 (2015)

마지막 밤(들) 中 (2015)

 

‘지금여기’ no-where

 

미: 전통적인 저널리즘 사진이나 다큐멘터리 사진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른바 순수예술 사진도 아니다. 그 때문에 이곳에도 저곳에도 끼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보여주기 위해서 찍는 사진인데, 사진을 보여줄 매체 또는 공간이 없다면 큰 문제다. 이 공간 ‘지금여기’를 마련한 이유도 그 때문인가?

홍: 공동운영자인 사진가 김익현과 함께 나와 같은 처지의 사진가들을 위한 대안공간을 늘 고민해 왔다. 미술이나 영화의 경우엔 일찍부터 대안공간 실험들이 있었지만 사진에는 없지 않았나. 어디에서도 불러주지 않는 사진가들이 모일 만한 공간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러던 중 갤러리에 들를 일이 있어 어릴 적 살았던 이곳 창신동에 오게 됐다. 예전 거리가 그대로 있었다. 서울 중심지 한가운데에 아직 이런 곳이 남아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동네가 너무 매력적이어서 처음엔 작업실을 구하려고 부동산 중개소를 통해 이곳저곳 찾아다녔다. 그러다 재봉 공장이었던 이곳을 발견하고는 홀딱 빠져서 김익현을 불러 계약을 해버렸다.

창신동 골목에 자리한 ‘지금여기’

창신동 골목에 자리한 ‘지금여기’

미: ‘지금여기’의 영문명이 ‘no-where’이다. 그런데 《미래에서 온 편지》의 제목도 윌리엄 모리스의 《News from Nowhere》에서 따온 것이다. 공간의 이름은 어떻게 지은 건가?

홍: 심보선 시인의 <지금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처음엔 시대착오적이지 않나 생각했다. 우리는 타임라인 속에 살고 있으니까. 그런데 영문으로 쓰고 보니 ‘no-where’로도 읽히더라. ‘지금여기(now-here)’라는 선언이면서 동시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못하는(no-where)’ 지금 우리의 처지를 보여주는 이름이라 생각해서 선택했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인간이기 위하여
사랑이기 위하여
無에서 無로 가는 도중에 있다는
초라한 간이역에 아주 잠깐 머물기 위하여

 

<지금 여기> 심보선

 

미: 집값이 싼 동네라고 하지만 넓은 공간이라 운영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동안 ‘지금여기’에서 기획한 좌담이나 전시들이 대관료를 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들도 아니었고. 운영비용은 어떻게 감당하는가?

‘지금여기’의 내부

‘지금여기’의 내부

홍: 월세로만 매달 70만 원이 나간다. 두 사람이 빡세게 아르바이트를 해서 조달한다. 가지고 있는 명함이 세 종류다. 사진가, 공간운영자 외에 스튜디오 디렉터이기도 하다. 사진촬영, 영상촬영, 영상편집, 책편집, 인쇄디자인, 전시기획, 부스설치 등이 다 가능한 사업자다. 처음엔 홈페이지 만들고 사진 찍는 일 외엔 아무 것도 못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끔씩 물어본다. 혹시 영상편집 할 줄 아냐, 책편집 할 줄 아냐, 우리 전시하는데 부스 만들 줄 아냐고. 그러면 무조건 다 할 줄 안다고 한다. 그리고는 돌아와서 혼자 배워서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재벌이 되어버렸다. 직원은 나 혼잔데. 돈 벌려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요새 다 그렇지 않나.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나. 조선일보와 삼성 일만 아니라면 뭐든지 한다.

미: 개인적으로 하는 사진작업과 상업적인 작업 사이에서 갈등이 많을 듯하다. 개인적으로 하는 작업은 예술이고 돈을 받고 하는 일은 예술이 아니라는 사람들도 다수 있다. 때문에 이들에게는 상업예술이라는 말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본인은 어떤가?

홍: 예술의 상업화에 대한 걱정이면 모르겠는데, 금전적인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해야 예술이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고? 옛날에는 한정된 소수만이 예술을 소비했다면 지금은 불특정 소비자에게 직접 파는 것이 가능해졌다. 먼저 팔지 않을 때 오히려 가격이 높아진다. 예술이냐 아니냐는 돈을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다. 돈 받아서 그들이 만들어 달라는 대로 만들었는데 쓰레기가 나올 때도 있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때도 있다.

 

예술가의 연대

 

미: 예술은 돈과 무관해야 한다는 논리로 많은 예술가에게 무료봉사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른바 재능기부다. 본인도 재능기부 경험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홍: 재능기부는 애매하다. 어디에는 서로의 노동력을 나눠 쓰는 공간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연대의 기본이라 생각한다. 《빅이슈》가 창간될 때 매력적인 사업이라 생각해서 내가 먼저 찾아가 재능기부를 하겠다고 했다. 그 조직은 품앗이가 필요하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서울시나 일반 기업에 재능기부를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재능기부 하는 예술가는 개념 있는 예술가라는 식으로 권장할 게 아니다. 좋은 품앗이는 서로가 주체가 된다. 하지만 관이나 기업에서 권하는 재능기부는 결국 갑과 을의 관계로 진행된다. 이런 경우에는 서로 하면 안 된다.

미: 그렇다면 정치조직인 정당과의 연대는 어떤가? 지금 여기 예술가들을 위해 노동당이 해야 할 역할이 있다면 말해 달라.

홍: 예술가들은 어느 정당에 소속되기가 힘들다. 소속돼도 당적이나 갖고 있지. 하지만 세월호 관련 기획들에서 보듯이 프로젝트 중심으로는 얼마든지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자기 작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중적인 작가부터 전위적인 작가까지 진보적인 예술가들 정말 많지 않나. 이들이 모일 수 있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판을 만들어주는 일을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진보정당에서 할 수 있을 것 같다. 꼭 당 깃발 꽂을 필요 없지 않나? 노동당 문예위나 정의당 문예위가 유의미한 공동기획을 한다면 참여할 작가들 많다.

미: 좋은 판을 마련하고 초대하면 본인도 응하겠다는 말인가?

홍: 물론이다. 안 할 이유가 없다. 젊은 작가들이 안 하고 싶겠냐. 판만 깔아주면 다 알아서 한다.

박정근 메인사진 (사진제공 박정근)

“상실감을 어떻게 채워나갈지가 중요하겠죠”

[2014.11 제14호 숨은 문화예술 당원 찾기]

“상실감을 어떻게 채워나갈지가 중요하겠죠”

국가보안법 위반사범이 되어야 했던 사진가, 박정근

 

인터뷰․정리|나도원 문화예술위원장
사진|박성훈 홍보실장, 박정근

 

 
박정근은 사진가이자 음악기획자이다. 조광사진관의 주인장이고, 십대 시절부터 마니아 취향의 록 음악을 제작해온 사람이다. 또한 그는 노동당의 당원이다. 사회당에 입당한 후 진보신당과 사회당의 통합을 통해 노동당의 당원으로 당적을 이어왔다. 6․4지방선거 때에는 여러 후보자들의 선거홍보물 사진촬영을 맡기도 했다.
또한 박정근은 유명인사이다. ‘우리민족끼리’의 내용들을 리트윗했다가, 북한을 찬양․고무했다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화제를 뿌렸다. ‘한국적 상황’이 낳은 희극이자 비극이다. 2012년 초에 구속된 후 1심에서 유죄, 2심에서 무죄, 그리고 2014년 8월에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기까지 박정근은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이례적으로 이번에는 문답 형식의 글을 싣는다. 성실한 말들을 육성 그대로 전하고 싶었다.

 

철거 잔해들을 갖고 놀던 변두리소년, 비주류 음악과 낡은 사진기와 함께

 

나도원 : 성장한 동네와 부모님, 특히 사진관을 운영하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세요. 청소년 시절의 학교생활과 관심사도 궁금합니다.

박정근 : 서울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이사를 하도 다녀서 아주 어렸을 때 기억은 희미하지만, 개발이 막 시작될 무렵의 길음뉴타운 근처, 정확히는 정릉과 돈암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고가도로가 없어지는 모습도 보고, 집들이 서서히 철거되는 모습도 많이 봤던 것 같네요. 갖고 놀던 것들도 철거 이후의 잔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제가 살던 집도 그렇게 철거가 예정된 집 중 하나였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나서 광진구 근처로 이사해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보냈고, 지금은 강동구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 운영하는 사진관은 사대문 안에 있지만, 따져보면 단 한 번도 서울의 변두리를 벗어난 적이 없어요.
아버지는 굉장히 활동적인 분이어서 젊어서는 스포츠사진을 주로 찍고 다니셨어요. 사진관을 운영하셨어도 밖에서 찍는 사진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 놀러간 곳이 굉장히 많아요. 없는 살림에 스키, 수상스키, 승마, 이것저것 시켜보려고 하셨지만 워낙 제 반응이 시큰둥한 탓에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별로 강요를 안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운동은 잘 안 해도 밖에 나돌아 다니는 건 좋아한다는 걸 아버지가 아셔서, 이젠 좀 집에 일찍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상황이 바뀐 거죠.
어렸을 땐 조용했지만 좀 겉도는 편이었어요. 남들 안 하는 게임하고. 조용히 어디 나가고. 고집은 센 편이라 한 번 꽂힌 건 계속 파는 편이었는데, 하필이면 그게 게임이랑 인터넷이었죠. 학교생활은 별 어려움이 없었어요. 괴롭힘을 당했다거나 싸우러 돌아다니거나 이런 건 없었어요. 너무 조용한 편도 아니었고, 적당히 말도 안 듣고, 웃긴 구석이 있는 친구라고 여겼는지 자연스럽게 지냈죠. 록/메탈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심심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게임을 어느 정도 하는 편이어서요. 중·고등학교 때는 게임 잘하는 애들이 아무래도 인기가 많았던 것 같아요.

나도원 : 음악에는 언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까? 고등학생 시절부터 인디레이블들 중에서도 비주류라 할 수 있는 ‘비싼트로피 레코드’를 운영하셨지요.

박정근 : 원래 이문세 같은 가요를 좋아했어요. 메탈리카(Metallica)나 메가데스(Megadeth) 정도의 메탈밴드 음악을 가끔 듣긴 했지만, 모르는 음악까지 찾아 듣던 편은 아니었어요. 이때쯤에 ‘밤섬해적단’의 권용만이 만화를 그리고 있었어요. 삼류만화라고, 연습장에 끄적끄적 그리는 만화였죠. 거기에 메탈밴드들이 조금 나와요. 카니발 콥스(Cannibal Corpse)였나, 이런 것들을 직접 찾아보기엔 인터넷만한 게 없었죠. 그렇게 조금 더 강한 음악을 파고들다보니 나중엔 같은 반 여자애가 마릴린 맨슨(Marilyn Manson) 음반을 생일선물로 주고, 인터넷에서 음악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만들어진 것이 ‘비싼트로피 레코드’였어요.

나도원 : 그러면 사진은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박정근 : ‘비싼트로피’에 한창 열심이었는데, 왼쪽 다리에 이상이 생겨서 병원에 오래 입원했어요. 레이블을 접게 되었죠. 큰 수술도 몇 번 하고 장애판정을 받았어요. 병실에 누워서 스무 살을 맞았고, 고3일 때도 대학에 대한 생각은 아예 없었는데, 몸져누워있으니 살 길이 막막하긴 하겠다 싶더라고요. 어머니가 ‘요즘 사회복지사가 괜찮다더라’ 하셔서 양호실에서 대충 수능 쳐서 나온 점수로 서울의 2년제 사회복지과에 들어갔는데, 너무 재미없어서 1년 다니고 때려치웠어요.
그때 마침 일본에서 살고 계시는 고모가 저희 집에 잠깐 묵게 되었는데, 선물로 무엇을 받고 싶냐 하시기에 ‘그냥 장롱에 있는 남는 카메라 한 대 주시라’ 해서 받은 게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된 시작이었어요. 마침 아버지가 사진관을 하시니 조명이며 카메라며 삼각대며 없는 게 없었죠. 덕분에 사진을 금방 익히게 되었고, 레이소다라는 사진 홈페이지에 이것저것 올리다보니 또 이 사람 저 사람을 알게 되었죠. 그렇게 먹고살 길을 사진으로 정하자 했어요. 집에서 꽤 반대를 하시다가 제가 고집을 부리니 이렇게 살게 놔두셨고, 한동안 이 스튜디오 저 스튜디오 다니면서 일을 꽤 많이 배웠습니다.
이력서에 쓸 게 많아질 때 쯤 아버지가 이제 사진관에 들어와서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고, 이전까지 다닌 광고스튜디오에 사진관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 뒤에 몇 달 쉬는 동안 만난 게 바로 두리반이에요.

 

두리반을 찾고 트위터를 즐기던 청년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시킨 국가

 

나도원 : 자립음악생산조합과의 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지금은 그들과 조광사진관 겸 자립본부라는 공간을 함께 사용하고 있지요.

박정근 : 자립음악생산조합은 두리반에서 만나게 되었고, 마침 당시 구성원들 대부분이 제가 오래 알던 친구들 또는 이미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사람들이라 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어요. 처음엔 레이블을 운영했던 박정근보다는 사진 찍는 박정근으로 만났기 때문에 그들이 공연을 하거나 사진이 필요할 때 함께할 때가 많았죠. 국가보안법 사건이 터졌을 때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고. 재판이나 선고가 있으면 항상 SNS의 공식계정에 공지를 올려주었어요. 레이블을 새로 시작하면서 제작자/기획자로서도 조합과 만날 기회가 많아졌고, 레이블을 새로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도 조합원으로 가입했습니다. 서로 만날 시간이 많아졌고, 음반제작지원도 조합 차원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고, 서로의 고민도 대충은 알고 있었죠.

조광사진관과 자립본부의 개업식을 알리는 포스터 (사진 : 조광사진관)

조광사진관과 자립본부의 개업식을 알리는 포스터 (사진 : 조광사진관)

그러던 중 사진관을 옮기게 되었는데, 발품을 팔다가 혼자 쓰기엔 좀 넓다 싶은 공간을 만나서 파트너를 떠올리다보니 마침 자립음악생산조합 역시 공연장이나 사무공간이 필요했던 상황이어서 지금처럼 공간을 공유하게 되었어요. 개업식 때 사람이 미어터져서 사람들에게 나눠줄 짜파게티를 하도 많이 끓이는 바람에 화장실에서 그 잔해를 제가 치워야했던 거랑, 다들 서툴렀던지라 한창 공사할 때 조합원들이랑 저랑 신나 냄새를 엄청 맡아가면서 장판바닥에 남은 본드를 지웠던 게 기억에 많이 남아요.

나도원 : 강동구 암사동에서 조광사진관의 가업을 잇자마자 구속되셨는데, 가족의 걱정이 심했겠습니다.

박정근 : 어머니나 아버지나 이런 일을 주위에서 본 적도 없었고, 주위에 운동권이나 수감된 적이 있는 친척들도 전혀 없어서 어안이 벙벙했죠. 삼청교육대 같은 것 아니냐는 생각도 하셨대요. 눈앞에 딱 보이는 압수수색 영장에 떡하니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쓰여 있으니 어머니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으시더라고요. 다행스럽게도, 제가 이런 일을 겪고 있다고 트위터에 먼저 말한 덕에 두리반에서, 명동에서, 당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가게로 찾아와줬고, (불행한 일이지만) 주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거나 겪은 적이 있던 친구들이 부모님에게 설명을 굉장히 잘 해줬어요. 일단은 두 분을 안심시키는 게 우선이었으니까요. 설상가상으로 얼마 안 지나 저를 애지중지해주셨던 친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 땐 정말 힘든 가을을 보냈던 것 같아요.
구속이 되자, 부모님께서는 어떻게든 제가 일찍 석방이 되길 바라시는 마음에 제게 재판부에 반성문을 써서 보내보아라 등의 말씀을 하셨어요. 부모님들은 정말 모르니까요. 변호사 두 분께서 제가 구속되어 있는 동안 부모님에게 잘 설명을 해주셨던 것 같아요. 재판을 진행하면서 두 분 역시 이 사건을 이해하시게 되었고, 제가 그동안 했던 일들, 가령 두리반에서의 활동이나 레이블 활동도 이해를 하시게 되었어요. 다행스러운 일이죠. 물론 그렇다고 부모님이 이전에는 제가 하는 일들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셨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나도원 : 그렇게 보안사범이 되었다가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마음고생이 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40일이나 구치소 생활을 하셨고요.

6차 공판이 끝난 후 재판자료를 들고 나오는 박정근 씨 (사진 : 노동당 서울시당)

6차 공판이 끝난 후 재판자료를 들고 나오는 박정근 씨 (사진 : 노동당 서울시당)

박정근 : 이것저것 안 좋은 일들이 겹겹이 많이 쌓여있었어요. 일단은 시간이 지나길 기다렸죠. 술은 술대로 늘고 걱정은 걱정대로 늘고. 내가 어려운 걸 친구들도 알고 있으니 이해 해줬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민폐였던 것도 한 둘이 아니고. 물론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어요. 술도 약도 안 먹고. 아직도 약 먹느냐 물어보는 분들이 종종 있는데 약은 구치소에서 끊었어요. 나름대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술도 좀 줄여보고 해서 지금은 사건 진행될 때보다 살도 좀 빠졌고요. 다만, 생각해보면 20대 중반을 전부 이 송사에 쏟아 부은 꼴이잖아요. 이 때가 중요한 때인 것 같은데, 이런 큰 일이 끝나고 나니 실은 허무감을 굉장히 많이 느껴요.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고민이요. 저도 그렇고 이런 공안 관련된 사건의 당사자들이 느끼는 감정들, 이 오랜 시간을 쏟아 부었지만 결과가 좋든 나쁘든 결국에 남는 커다란 상실감을 어떻게 채워나갈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친구가 없어서 시작한 당 활동? 연대와 사진으로!

 

나도원 : 당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말씀해주실래요?

박정근 : 간단해요. 친구가 없어서 하게 된 거예요. 원래는 사회당에 입당했고, 그 때에는 ‘두리반’에 있었죠. 강의도 많았고, 농담도 많았고, 사건도 많았고, 무엇보다 진보정당에 가입한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자연스레 관심이 가기 시작했어요. 진보신당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도 꽤 많았어요. 물론 두리반 이전에도 집회에 가끔 나가긴 했어요. 중학교 때부터요. 별로 당 활동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것도 없었고. 강령을 천천히 읽어보고 입당했습니다. 사회당 시절엔 포이동에 자주 갔어요. 포이동은 제가 어렸을 때 살던 곳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 애당초 관심이 많았던 곳이었는데 기회가 닿아서 자주 오가곤 했어요.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같은 노동자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당에 입당하면서 관심을 갖게 된 쪽이었고, 나중에서야 알게 된 부분이 굉장히 많아요. 그리고 구속이 되고 석방이 된 날 사회당과 진보신당이 통합을 했죠.

나도원 : 6․4지방선거 때에 노동당 후보들의 사진들을 찍어주셨습니다.

박정근 :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지역활동을 오랫동안 열심히 하고 있었다는 걸 많이 느꼈어요. 증명사진 찍을 때를 빼면, 이렇게 조명 놓고 사진관에서 사진 찍힐 일이 흔치 않은 일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조금 더 시간이 많았다면 좀 더 신경 써서 찍었을 텐데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각자 활동하시는 분야에 어울리는 모습들을 가지고 있구나 생각했는데, 그걸 사진가가 잘 끌어냈는지 아직 잘 모르겠네요. 다음에도 기회가 된다면 조금 더 성심성의껏 찍어보고 싶습니다. 구태의연한 선거포스터랑은 좀 다른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기술만 좋다고 되는 문제가 아닌 것 같아서 제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입니다.

최근에 앨범 《동물》을 발표한 단편선과 선원들 (사진 : 박정근)

최근에 앨범 《동물》을 발표한 단편선과 선원들 (사진 : 박정근)

박정근은 최근 발표된 ‘단편선과 선원들’의 《동물》(2014)의 산파이자 음반에 담긴 멤버들의 사진들을 찍은 장본인이다(자립음악가 단편선 또한 당원이다). 보기에 따라선 기괴한 사진들인데, 비가 쏟아지고 날은 어둡고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 등 여의치 않은 상황 속에서 작업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매끄러운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생각과 달리 거친 사진들이 나왔지만 반응은 오히려 괜찮다. 그는 이 음반에 대하여 “굉장히 섬세하고 또렷한 음악”이자 “좋은 작업자들이 모여 만든 결과물”이라며 자랑 겸 칭찬을 이어갔다.

 

박정근 당원의 인터뷰 전문은 노동당 <정치신문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laborparty.kr/1440325

노동당 문화팟캐스트 <컬쳐쇼크> 6회 박정근 당원 편 듣기
http://www.podbbang.com/ch/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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