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공산당 당사 벽면에 게시된 아카하타 신문

먼 좌파 이웃 좌파 ④ 동병상련? 이웃 나라 일본의 좌파 (2)

[2013.11 제3호 먼 좌파 이웃 좌파 ④]

동병상련? 이웃 나라 일본의 좌파 (2)

 

장석준|부대표

 

 

 

노동조합총평의회의 배타적 지지로 존립 유지돼

 

“5만 당원으로 천만 표를 모으는 불가사의한 당.” 한 정치학자는 일본 사회당을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실제로 사회당 당원 수는 원내에 다수 의석을 확보한 좌파 대중정당 치고는 너무나 적었다. 1969년 당원 재등록 기간 중에 확인된 당원 수는 고작 3만 명이었다. 이중 5천 명 가량이 국회의원과 지방의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회당에는 간부만 있고 당원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회당이 존립하고 또한 제1야당으로 버틸 수 있었던 요인은 단 하나, 바로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 ‘일본의 민주노총’ 이라 할 수 있었다)의 배타적 지지였다. 총평은 선거 기간 중에 사회당의 자금과 조직 동원을 떠맡았다. 대신 사회당 국회의원 대부분은 총평 간부 출신이었다.

일본의 노총인 연합(렌고)의 실내 집회 모습

일본의 노총인 연합(렌고)의 실내 집회 모습

사실 좌파정당이 노동조합과 긴밀할 관계를 맺는 것 자체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느냐가 문제다. 일본의 노동자들은 당에 대거 개별 입당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사회당에 영국 노동당 식의 노동조합 집단입당제도가 존재한 것도 아니었다. 오직 총평 간부들만 사회당에 입당하고 당과 관계를 맺었다. 비록 총평 간부들이 급진적 성향을 지녔다고는 해도 이렇게 의원과 의원 지망자, 노조 간부들로만 이뤄진 좌파정당이 오래도록 건강하게 발전하기란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일본의 노조는 산별이 아닌 기업별이었다. 일본 노조 운동은 조직률이 50%를 넘던 전쟁 직후의 전성기에 산별로 전화하는 데 실패했다. 기업별 노조체제가 정착되었다. 그 결과,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대기업 중심의 기업별 노조 체제 바깥에서 계속 미조직 상태로 머물고 말았다.

이런 노동조합운동의 한계는 고스란히 사회당의 한계로도 다가왔다. 대기업 노동조합은 점점 우경화했고, 그러면 그럴수록 사회당은 총평 산하 일부 전투적 공공부문 노동조합만의 노동자정당이 되어갔다. 그리고 대다수 미조직 노동자에게는 ‘남의 당’ 이었다. 이런 사회당을 국민들이 수권능력을 갖춘 당이라고 볼 리 만무했다. 사회당은 언제인가부터 자민당의 지나친 횡포를 견제할 순단일 뿐이었다.

 

총평 의존 정당이었던 일본 사회당

 

이런 상황에서 총평계 노동운동의 위기가 닥쳤다. 1980년 중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자민당은 기존의 일본형 케인스주의를 시장지상주의적 긴축 재정으로 전환하면서 동시에 노동계를 손보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1987년에 ‘국철(國鐵) 개혁’ 이라는 구호 아래 철도 사유화를 단행했다. 총평의 핵심인 공공부문 노동조합을 깨기 위한 조치였다.

같은 해에 민간 대기업 노조의 우경화한 분위기를 대변하는 새로운 총연맹 렌고(連合, 일본노동조합연합)가 800만 조합원을 자랑하며 출범했다. 2년 뒤에는 총평이 결국 해산하고 렌고에 흡수 통합됐다. 렌고의 노선은 총평의 정반대라고 보면 된다. 노동조합에 의존해온 사회당으로서는 이제 렌고에 맞춰 자신도 오른쪽으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신세가 되었다. 노조운동의 우경화와 함께 노동자들의 사회당 지지율도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사회당은 나름의 자구 노력을 벌였다. 시민운동 출신의 여성 정치인 도이 다카코를 대표로 내세운 것도 그 일환이었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인지 1989년 참의원(상원) 선거와 1990년 중의원 선거는 사회당이 오랜만에 약진하는 의외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사회당의 득표율이 다시 20%를 넘어섰다. 그러나 사회당의 약진은 오히려 당을 궁지에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다. 사회당에 표를 빼앗긴 소수 정당들(대표적으로 공명당)이 자민당과 유착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보수 세력 주도 정계개편에 시동이 걸렸던 것이다. 렌고는 이를 부채질하는 역할을 했다. 렌고는 “사회민주주의와 리버럴 세력의 총결집(이른바 ‘사민-리버럴 정당’론)”을 주장하며 노골적으로 좌파정당인 사회당을 해체하고 중도정당을 건설하라고 요구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2012년 한국 대선의 이른바 ‘빅 텐트’ 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자민당에서 떨어져 나온 일본신당, 신생당 등 보수 계열 신당이 대거 선거에 참여한 93년 7월 중의원 선거는 사회당 붕괴의 신호탄이 되었다. 사회당의 의석은 136석에서 70석으로 절반이 줄었다. 당의 오른쪽에서나 왼쪽에서나 똑같이 대규모 이탈이 나타났다. 렌고 소속 노조 지도부는 사회당이 너무 왼쪽에 있다며 사회당이 아닌 보수 신당들을 지지하기로 결의했다. 반면 기존 사회당 지지자 중에서 38.9%만이 사회당을 지지하고 나머지는 대거 이탈했는데, 이 중에는 좌파 성향 유권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사회당의 와해가 시작된 것이다.

총선 직후 렌고 지도부의 압력으로 일본신당의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주도하는 최초의 비자민당 연립정부가 들어섰다. 이 연정에 사회당도 무라야마 토미이치 신임 위원장이 입각했고 한때 무라야마가 총리가 되기도 했다. 겉만 보면, ‘집권’ 이고 ‘성공’ 이었다. 하지만 공동 집권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자민당에서 탈당한 보수 정파들이었다. 보수파와의 공동 집권은 사회당의 정체성 위기만 가중시켰다. 사회당의 영혼이 사라진 그 자리에서 더 이상 대중적 좌파 구심은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 사회의 총보수화가 시작된 것이다.

 

총보수화의 시작이 된 보수파-사회당 공동 집권

 

지금 일본의 좌파 정치 공간은 초토화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회당은 1996년 1월 사회민주당(약칭 사민당)으로 당명을 바꿨다. 이때 좌파 일부는 탈당해 신사회당이라는 소규모 정당을 따로 차렸고(지방의원은 있으나 아직까지 원내 의석은 없다), 48명의 우파 의원은 렌고의 권유에 따라 신생 중도우파 정당인 민주당에 합류했다. 사회당의 전통은 사민당으로 이어졌지만, 사실상은 기존 사회당의 붕괴였다.

사민당은 소선거구-비례대표 병립제가 처음 실시된 96년 중의원 선거에서 16명의 당선자를 냈다. 비례대표 선거에서는 공산당이 13%를 얻는 데 반해 6%만을 얻었다. 사민당은 초기에도 그래도 도이 다카코 위원장의 인기에 의지해 근근이 버텼지만 도이가 물러난 뒤에는 계속 당세가 추락하고 있다. 작년 중의원(총480석)선거에서는 정당 투표 2.38% 득표로, 2개의 의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물론 공산당이 버티고 있다. 일본 공산당은 현재 자민당보다 더 많은 지방의원을 보유하고 있다. 중의원 선거에서는 정당투표 6.17% 득표로 8석을 확보했다. 일단 선방이었다. 그러다가 올해 도쿄도(都) 지방선거에서는 의석을 8석에서 17석으로 늘리며 상승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7월의 참의원(총242석) 선거에서는 기존 의석 6석에서 5석을 더하는 결과를 얻었으며, 더 중요한 것은 지역구 당선자를 배출했다는 사실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비록 자민당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치이지만 6% 정도의 지지율을 보이며 유일 좌파 야당이자 제1야당의 위상을 인정받고 있다.

자유민주당의 헌법 96조 개정에 반대하는 일본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공동 시위

자유민주당의 헌법 96조 개정에 반대하는 일본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공동 시위

사회당이 붕괴하고 ‘사민-리버럴 정당’ 민주당마저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한 공간을 공산당이 채워나가고 있는 셈이다. 공산당이 그나마 버티고 있으니 다행이다. 하지만 워낙 사회당, 공산당, 신좌파 사이의 분열과 대립이 심했던 터라 공산당이 과연 진보적 여론 전체의 새로운 대변자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최근 일본 공산당의 정책에 대해서는, 시이 가즈오 위원장의 연설문들을 모은 『지금, 일본 공산당』[이매진, 2013]을 참고할 수 있다.)

아무튼 일본 좌파정당의 역사를 보면 볼수록 저들이 20세기 후반에 보인 여러 패착이 한국 진보정당운동에서 지난 2-3년 동안 집약적으로 반복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두 나라의 진보좌파 모두 지금 그 폐허를 수습하고 새 출발을 모색해야 하는 처지다. 동변상련, 이것이 지금 두 나라 진보좌파를 가로지르는 열쇳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