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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예술정책의 두 가지 위기

[2016.01 제27호 화요일의 약속]

한국 문화예술정책의 두 가지 위기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염신규

 

사진·글|현린 편집위원, 문화예술위원장

 

 

 

그는 93학번 국문학도였다. 하지만 문화를 매개로 사회운동을 하고 싶었던 그는, 문학제가 아닌 영화제를 기획했다. 졸업 후에는 직접 픽션영화를 찍으려고도 했으나,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판단해 결국 영화의 꿈은 접었다. 대신에 영화감독 이창동이 문화관광부 장관이 되던 2003년, 선배의 계략에 넘어가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민예총) 정책팀장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민예총의 정책 기능이 소멸했다고 판단해서 2009년 민예총을 그만둔 후에는, 옛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노문연) 활동가들이 중심이 된 문화예술 사회적 협동조합 ‘자바르떼’에 결합한다. 그곳에서 지역문화예술 활동의 어려움을 몸소 체험한 후에는 시인 출신 국회의원 도종환의 비서관으로 일하며 문화기본법 제정에 관여한다. 의도한 일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요컨대 그는 90년대 학번이면서도 80년대 말 문화운동의 끝자락을 경험하였고, 90년대 문화운동의 산물이 어떻게 2000년대 참여정부 문화예술정책에 반영되었는지를 목격했으며, 불과 얼마 전까지 여의도에서 문화예술 관련 법안을 만들어왔다. 지나간 문화운동의 한 세대를 증언하고 다음 세대를 위한 조언을 할 만한 사람으로 그를 빼놓을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네 번째 화요일의 약속은 한때 영화감독을 꿈꾸던 청년, 그러나 지금은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이라는 건조한 직책을 맡은 염신규 문화정책연구가와 잡았다.

 

미래에서 온 편지(아래 미) : 최근의 총선에서 각 정당이 내놓은 문화예술정책들을 비교해 보면 여당이나 야당이나 비슷비슷하다. 심지어 두 거대 보수정당들의 문화예술정책과 진보정당들의 문화예술정책을 구별하기도 힘들어졌다.

염신규(아래 염) : 한국 문화정책이라는 게 70년대 초반에 본격적으로 정책영역에 들어왔지만, 90년대 후반까지 크게 변화가 없었다. 데칼코마니라고 해야 할까, 박정희 정권의 민족문화정책과 이에 대항하는 아래로부터의 민족문화운동은, 서로 지향점이 달랐지만 근대적 한국문화가 무엇인가 질문을 던졌다는 점에서는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알다시피 박정희 정부는 민족문화중흥이라는 걸 앞세워 문화영역 전체를 국가관리체계 속에 집어넣으려 했다. 한국적 민주주의처럼, 한국적 문화가 무엇인지를 국가적 차원에서 만들었다. 예컨대 1973년에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을 만들었는데, 80년대 중반까지 이 기관의 주요사업이 한국학 연구였다. 곳곳에 위인 동상을 세운 것도 그렇고, 관제화된 민족문화를 퍼트리려 했다. 소위 말하는 진보적 문화운동도 70년대 초반에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박정희 유신정권이 예술가들의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면서 김지하 씨의 오적필화 사건과 문인간첩단 사건이 터지고, 한국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만들어졌다. 이런 운동이 지금의 민예총을 낳은 민족문화운동으로 이어졌다. 예컨대 조동일 교수의 판소리, 탈춤 부흥운동 등이 그렇다. 그런 흐름들이 90년대까지 이어지면서 다른 정책에 비해 한국의 문화정책 발전이 지체되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문화운동을 했던 집단들이 지금보다 왕성하게 활동했고, 문화연대라든가 민예총의 정책기능이 살아있었다. 초창기 참여정부는 과거 정부와 달리 적어도 문화정책에서만큼은 진보적인 의제를 많이 수용하려고 했고 토론회도 자주 열었다. 그래서 문화연대나 민예총 등에서 문화정책을 연구하던 사람들이 상당히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 결과 2004년 참여정부에서 『예술의 힘 – 새로운 한국의 예술정책』과 『창의한국 – 21세기 새로운 문화의 비전』을 출간했다. 현재까지 나온 문화정책 의제들이 이 두 권 안에 다 들어있다. 그 후 10년 동안 문화운동계나 보수적 행정부나 가릴 것 없이 참여정부 초창기에 세팅됐던 이 의제들 중에 필요한 것을 써왔다.

 

문화운동주체들의 배제 또는 소멸의 위기

 

미 : 당시 진보적이었다는 그 정책들 다수가 실현되지 않은 원인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염 : 문화정책 관련 실무를 담당하는 입장에서 참여정부 당시의 정책수립과정을 긍정적으로만 보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정책이 너무 많이 쏟아져 나왔다. 정책이라는 게 현장의 변화 속도와 비슷하게 가야하는데, 문화이론이나 정책이론 공부한 입장에서는 준비를 많이 했다지만, 현장은 그렇지 못했다. 지역의 문화분권, 문화자치가 중요하다면서 2001년에 이미 지역문화의 해를 선포했지만, 막상 지역에서는 문화자치를 할 역량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들어보지도 못한 담론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책이 현장으로 전달되려면 행정을 거쳐야 하는데, 행정체계가 다양한 문화담론을 수용할 만한 단계가 아니었다. 정교한 문화담론에 기반을 둔 정책들도 행정을 거치면서 단순한 한두 줄의 사업으로 단순화되고 말았다. ‘문화다양성’ 개념이 대표적인 예이다. 문화다양성은 다양한 문화정책에서 일관적으로 관철되어야 하는 관점의 문제이다. 그런데 막상 정부정책으로 들어가면 이주노동자들이나 이주여성들 대상으로 하는 ‘문화다양성 사업’이라는 하나의 개별사업이 되고 말아서, 다른 문화사업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미 : 문화운동계 활동가들이 정부정책안 마련에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정작 현장 문화운동은 약화되었다? 같은 시기, 민주노동당이 원내진출을 했지만 정작 현장 노동운동은 약화되었던 상황과 일치한다. 우연의 일치는 아닌 듯하다.

염 : 2000년대 중반 민예총 활동하면서 처음 위기감을 느꼈다. 소비문화 외 민간문화운동 영역이 위축되었다. 참여정부 당시 나뿐만 아니라 활동하던 사람 대부분이 그런 걸 느꼈다. 영상문화운동을 예로 들자면, 2000년대 이후로 영상문화를 즐길 수 있는 인프라가 풍부해졌다. 미디어센터도 많아지고, 예술영화전용관도 생기고, 시민들이 보고 싶은 영화를 볼 수 있는 인프라 자체는 좋아졌다. 하지만 상업영화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를 개별적으로 소비한다. 영화를 가지고 타인들과 소통하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문화는 약화되었다.

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대학에서 풍물패나 노래패 활동을 하면, 그런 곳에서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관심을 가져주었다. 꽃다지가 공연을 하면 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최소한 젊은 세대들은 당장 경제적 이득이 없어도 그 문화(활동)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해방감을 느꼈고, 문화라는 틀 안에서 노동·통일 외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에 관해 소통했다. 그런데 IMF 사태 이후 돈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사회로 바뀌었고, 청년세대가 생존에 떠밀리면서 문화주체가 형성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미 : 그나마 참여정부의 문화예술정책 기조도 초기의 시민의 문화향유권 신장이나 문화민주주의 확대에서 문화산업주의로 완전히 방향을 틀었다.

염 : 문화민주주의와 같이 문화에서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려고 한 사람들이 힘을 얻었던 시절은 이창동 장관이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까지였다. 사실 정권 초기 1~2년 동안 외부에서 들어간 정책연구자들과 관료들 사이에서 경쟁이 치열했다. 하지만 관료들은 행정 관련 정보를 거의 독점하고 있어서 이기기가 쉽지 않다. 결국 정태인이나 이창동이 물러나면서 다시 관료주의적으로 돌아섰고, 문화산업발전을 위해 각종 규제를 풀기 시작했다. 이런 면에서 참여정부 시절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다. 주의·주장을 행정 안에서 어떻게 녹여낼 것인가. 제도적인 측면에서 디테일한 검토를 해야 한다. 쉽지 않다. 그런 전문가그룹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다.

미 : 흥미롭게도 참여정부 시절 준비하던 문화기본법이 박근혜 정부 들어서 마침내 제정되었다. 참여정부 당시 준비하던 문화기본법과 현재의 문화기본법에 차이가 있는가?

염 : 나도 국회에 있었기 때문에 문화기본법 제정에 관여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출신인 새누리당 김장실 의원실에서 발의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실제로는 정부안이다. 그런데 현재의 문화기본법은 문화부의 업무를 나열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말하자면 문화기본법이 아니라 ‘문화부 업무를 위한 기본법’이다. 애초 문화기본법 제정에는 2가지 취지가 있었다. 첫째는, 1972년에 제정된 후 40년 이상 수정해 오면서 누더기처럼 이상해진 문화예술진흥법을 손봐서 법적인 체계를 정비하자는 것이었다. 둘째는, 문화민주주의 이념에 따라 국민의 문화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법적체계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현재 문화기본법은 2가지 취지 중 문화 관련 법체계를 정비한다는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그러나 문화예술에 관한 시민의 권리, 문화예술이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구체화시키는 일은 배제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문화기본법이 이렇게 형식적으로 만들어지는 데 동의하기 힘들었다. 이런 법이 우리 삶에서 왜 중요한지 국민들이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문화기본법이 만들어지기를 바랐는데, 그런 과정이 전혀 없었다. 그 결과, 문화예술인이나 일반시민이 문화기본법을 잘 알지도 못하고 이걸 만들어서 뭘 할 수 있는지 상상할 수도 없다. 참여정부 당시 문화헌장을 문화헌정제정위원회를 통해서 만들었듯이, 문화기본법도 일개 의원실에서 만들 것이 아니라 제정위원회를 만들어서 1년간의 논의과정을 통해 만들어야 했다. 문화기본법이 왜 필요하고,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소통도 하고, 가치도 공유하고, 홍보도 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박근혜 정부는 문화기본법을 그런 규모에서 생각하지 않았고, 문화헌장에 제시된 문화를 통한 진보적 가치를 실현한 의지도 없었다.

법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전문가를 포함한 굉장히 폭넓은 분야의 사람들 사이의 토의가 필요하다. 물론 많이 싸울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문화란 무엇인가, 문화적 권리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놓고, 서로 다른 의견을 들을 필요가 있다. 문화예술을 보수적으로 예술영역으로 축소시켜서 보는 입장도 있지만, 광역화시켜서 보는 관점도 있다. 엘리트적인 관점에서 보는 입장도 있지만, 전혀 반대에서 보는 입장도 있다. 그런 모든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1년 정도 박 터지게 싸우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게 거버넌스다.

 

문화부 관료들의 전문화의 위기

 

미 : 문화기본법 제정과정도 그렇고 각종 문화예술정책 실행과정도 그렇고, 시민들이 참여하는 문화운동적 차원의 토대가 없으면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보인다. 현재의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여건에서 문화운동이 부활할 수 있다고 보는가?

염 : 인적자원의 풀 자체는 과거보다 넓어졌고 다양해졌다. 중앙정부 차원에서 이뤄지지 않지만 지자체나 지역공동체 차원에서는 다양한 활동이 이뤄지기 때문에, 경험이 축적되어있다. 그리고 과거 문화운동계 선배들은 완전히 제도권 밖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문화정책을 현실화 시키는데 한계가 있었지만, 현재는 참여정부를 통한 행정경험도 있다. 서울 성북구의 예에서 보듯 중앙정부 차원에서 하기 힘들었던 문화정책을 지역사회에서 실험하고 활동하는 등 현장성 있는 정책들이 실험되고 있다. 지금은 개별적으로 산개해있긴 한데, 여하간 제도 안에서 실험된 것이기 때문에 제도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졌고, 실제로 문화정책을 현실적으로 실현하는 데 있어 경험도 늘었다.

반면 또 다른 위기감을 느끼게 하는 부분도 있다. 참여정부 시절에 문화운동진영 사람들이 한국의 문화행정체계를 경험했다면, 반대로 문화부 관료들은 이쪽에서 이루어지는 정책 이슈들을 경험했다. 과거 십 수 년 전에는 문화부 관료들이 지금처럼 실력이 좋지 않았다. 문화정책이 중요하지도 않았고, 문화부가 인기도 없는 부처였고 해서, 문화부 관료들 중에 정책 전문가들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문화부처 관료들이 과거에 비해 전문화되고 있다. 더구나 국가는 예산과 정보와 인적 인프라를 키울 수 있는 안정적 틀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 정부 관료들의 정책적 전문성은 나아지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시민문화 인프라는 풍부하지도 않은데다 활동가나 역량을 재생산하는 구조도 갖추고 있지 않다. 문화활동은 활발하게 하고 있지만 문화정책 영역에서는 인력도, 물적 토대도 부족하다. 참여정부 5년 동안 많은 이슈들을 놓고 정부와 협력하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면서 활동가들이 많이 지쳤다. 80년대 후반 민예총, 90년대 후반 문화연대 설립 이후, 민간에서 키워왔던 역량을 다 소모해 버린 것이다. 이렇게 가면 정책이라는 게 한두 사람의 전문가에 의해 이뤄지고 기본적인 민주성을 갖기 힘들게 된다. 정책이 뿌려지는 형태로 집행될 수밖에 없고, 현장의 문제들은 묵살될 수 있다.

미 : 그런 점에서 당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현재 노동당은 문화예술정책안을 생산할 만한 토대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과거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문화예술정책 생산에 참여했던 이들도 지금은 흩어져 있는 상황이다.

염 : 진보정당의 역사 속에서 NL 계열은 통일 정책에 주력해 왔고, PD 계열은 노동과 복지 정책에 주력해 왔다. 그것 외에 다른 사회정책을 다루기에는 여러 모로 여건이 갖춰지지 않았다. 제반 정책 생산에서 진보정당이 부르주아 정당에 비해 역량이 부족한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운동영역에서도 진보적 가치를 문화 속에 투영시키는 데에 있어서 역량이 부족하다.

사실 민주노동당 시절로 돌아가 봐도, 민주노동당이 개별적인 의제들을 많이 던지기는 했지만, 그것은 당시 워낙 많은 문화정책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당에서 써먹을 아이템들이 많아서 그랬던 것이지, 당 안에 문화예술정책을 생산할 역량이 충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민주노동당 시절 문화예술위원회가 있었지만, 당시 문화예술위원회를 과거의 문선대 관점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문화예술정책에 대한 연구가 충분히 이뤄질 수 없었다.

한 예로, 18대 총선 당시 민주노동당 문화정책을 만들려고 정책단위를 급조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정의당으로 간 이지안 부장이 실무자였는데, 이지안 부장이 워낙 문화단체들과 교류를 많이 하던 사람이라 인맥이 넓었다. 그래서 자신이랑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아서 뚝딱 문화정책을 만들었다. 평소에 논의를 하면서 만들어야 하는데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나마도 그때 민주노동당이 지금 노동당보다 인적 풀이 컸으니까 가능했다.

남아있는 소수의 문화정책가들도 과거의 문제의식을 진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은 새로운 이야기를 못하는 부분도 있다. 필요한 문화정책이 무엇인가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당 차원의 투자를 통해서 정책역량을 지금보다 훨씬 끌어올리지 않으면, 정책의 주도성을 정부한테 내줄 수밖에 없다. 지금 같은 식으로 가서는 정부정책 뒤따라 잡기 수준을 넘기 힘들다.

 

삶에 일어날 변화를 상상하게 하는 공약이 필요

 

미 :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임금을 인상하는 것이 인간다운 삶을 위한 그릇이라면, 그 그릇을 채우는 것이 문화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중장기적으로 반드시 수행해야 할 과제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당장 2016년 총선을 대비해서 문화예술정책을 준비해야 한다. 과연 기존의 문화예술정책을 넘어서는, 그러면서도 가장 노동당 정책다운 문화예술정책을 준비할 수 있을지 고민이다.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염 : 진보정당으로서 내가 속해 있는 당의 문화정책이 수구정당이나 자유주의적인 보수정당의 문화정책과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나 역시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고민이긴 한데, 늘 부족하다. 그런데 나 혼자 풀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국가정책 전체를 포괄할 정도의 정책을 마련하기는 힘들 것이라 본다. 오히려 당이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유권자들 피부에 와 닿는 몇 가지 아이템을 만들어서 당 내외 사람들을 모아 함께 논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그냥 문화향유권을 높이겠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소리이고, 아무 의미가 없다. 이게 왜 필요하고,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 완결성 있는 정책을 몇 가지라도 내 놓을 수 있어야 한다. 가지 수는 적어도 조리가 잘 된 정책안을 내 놓을 필요가 있다. 꼭 역량 있는 사람만 모일 필요도 없다. 관련된 사람들,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서, 상당히 세부적인 실현방안까지 준비할 필요가 있다. 공약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삶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 상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보편적 복지 차원에서 문화향유권을 실제적으로 확대할 수 있는 정책도 더 구체화된 단어를 통해서, 예를 들면 문화급여 같은 것을 통해서 제시할 수 있다. 장례급여처럼 국민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하는 10대 기본급여라는 것이 있다. 문화기본법에 의해 문화권이라는 것이 만들어졌으니, 문화적 향유권은 국가가 보장해야 하는 국민의 기본권이 되었고, 이에 따라 문화급여를 만들 수 있는 근거가 생겼다. 문화바우처라든가 문화카드 등 기존의 선별적 문화복지정책 대신에 이제는 문화급여라는 이름으로 보편적 문화복지정책을 만들고 필요한 예산을 정교하게 짜야 한다.

돈을 나눠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민들이 체험을 통해서 자기 문화적 취향이나 역량을 만들어 가는 것이 문화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이를 매개할 수 있는 인력들이 있어야 한다. 지역이나 커뮤니티 단위에서 문화복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할 수 있는 전문 인력과 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장이 있어야 한다. 재원은 중앙정부에서 책임을 가지고 확보를 하더라도 지역문화 생활권에서 향유할 프로그램 자체는 그 생활권에 있는 문화 매개자들이 자율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 외에 표현의 자유 경우에도 적극적 관점의 표현의 자유를 구현할 수 있는 정책안을 준비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표현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면, 북유럽의 경우에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를 법적으로 처벌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예를 들어, 성소수자들이 문화제를 하는데 종교단체에서 이에 대한 반대집회를 하면, 이 집회는 법적 처벌 대상이 된다. 국가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현 정권 아래에서 하기 민망한 얘기이긴 하지만, 한국도 국가가 나서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당에서 기존에 계속 의제로 삼아 왔던 것이 예술인 복지의 문제인데, 기본적으로 계속 가져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다만 지금의 예술인 복지사업 수준에서 머물지 않고 예술노동이라는 기본 관점부터 시작해서 틀 자체를 새롭게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최소한 다른 정당의 정책과는 차별화된 제안은 내 놓을 수 있다고 본다.

진보정당의 총선대응 평가 – 과거에서 배우다

[2016.01 제27호 특집]

진보정당의 총선대응 평가

 

 

20대 총선이 다가왔습니다. 네, 또다시 선거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노동당이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반성할 부분이 더 많은 과거이지만, 진보정당을 중심으로 지난 총선들을 평가해보았습니다. 과거를 기억하고 배움으로써, 오늘의 어려움을 풀어나갈 실마리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두의 목소리

[2016.01 제27호 기획]

모두의 목소리

 

 

2016년 새해를 맞이하여, 그동안 진보진영 내에서도 뒤로 밀려나기 일쑤였던 분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눈꽃송이 같은 삶을 바라는 주부, 이제는 솔직하게 말하고픈 성소수자, 망할 보호주의에서 벗어나고픈 청소년, 오늘도 사람의 온기로 겨울을 버텨내는 청년작가까지, 2016년의 한국사회를 저마다의 모습으로 살아내는 우리 모두의 소리에 귀기울여주십시오.

 

지역현장_도비라

둠칫둠칫 두둠칫, 웃음이 넘쳐나는 ‘몸치’들의 ‘연대’기

[2015.12 제26호 지역에서 현장에서]

두둠칫, 웃음이 넘쳐나는 ‘몸치’들의 ‘연대’기

 

김세현|두둠칫 단원

 

 

 

엄혹한 시대이다. ‘가정맹어호()라 하였던가. 수많은 사람들이 남한사회의 모순 속에서 고통 받고 있다. 세상을 바꾸지 않는 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그렇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이곳에서 우리의 삶을 바꾸는 정치가 필요하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우리는 이곳, 노동당에 모였다. 많은 당원들이 사회의 곳곳에서 노동당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밤낮없이 노력 중이다.

하지만 모든 당원들이 당의 이름 아래 모이고, 당의 이름으로 활동하지는 않는다. 당의 역량이 축소되고 당원들이 유실되는 과정에서 당 조직과 당원들 사이에 괴리가 발생했다. 각 당원들이 진행하는 운동의 성과가 당으로 모이기 위해서는 ‘당원인 운동가’들이 ‘당 운동가’가 되어야 한다. 무엇이든 좋으니, 나부터라도 당의 이름을 걸고 당과 함께 활동하고 싶었다.

나에게는 ‘몸치패 두둠칫(이하 두둠칫)’이, 내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곧 당의 활동이 되는 실천을 할 수 있는 곳, 다시 말해 당의 이름을 걸고 우리의 정신과 가치를 실천하는 방법이었다. 두둠칫의 활동은 당 깃발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덕분에 당 활동이 더 즐거워졌고, 내 활동의 기반이 당이 되었다. 두둠칫에서의 활동은 우리의 연대가 곧 당의 연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값진 경험들이다.

 

열정으로 뭉친 이름값 하는 ‘몸치’패

 

두둠칫은 올해 초 서울시당 대의원대회 사전행사를 위해 조직되었다. 청년당원들의 대화방에서 반쯤 농담 삼아 당에 몸짓패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 말이 현실이 되었다. 한 명 한 명 단원을 모아 일곱 명의 청년당원들이 함께 <바위처럼>과 <새물> 두 곡의 춤을 추었다. 나는 학교에서 몸짓패를 해보았다는 이유로 ‘춤 선생’으로 발탁되었다.

그 후 반년, 그동안 두둠칫은 당 행사와 문화제, 집회현장 등 많은 연대공연에서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춤을 추었다. 시간이 맞는 날에는 단원들끼리 모여 연습을 하고, 공연이 끝나면 반드시 그날의 공연을 찍은 영상을 돌려보며 잘못한 점을 고쳐나갔다. 덕분에 춤 실력도 늘었다. <바위처럼>은 이제 다들 능숙하게 출 수 있게 되었고, 아예 동작이 맞지 않았던 <새물>의 춤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래퍼토리도 많이 늘었다. 집회의 성격에 맞는 공연을 하기 위해 <진짜사장이 나와라>나 <단결투쟁가> 등의 춤을 배웠고,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는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의 춤을 배우기도 했다. 단원도 열 세 명으로 늘었다. 단원의 면면도 다양하다. 많은 단원들이 지역운동에서, 부문운동에서, 그리고 당직자로서 활동 중이다.

공연 준비를 위해 모인 두둠칫 단원들 (사진: 백상진 두둠칫 매니저)

공연 준비를 위해 모인 두둠칫 단원들 (사진: 백상진 두둠칫 매니저)

공연을 많이 하다 보니 해프닝도 있었다. 4월 4일 명동 서울중앙우체국 전광판 아래에서 열기로 한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 비정규직 연대문화제가 취소되었다. 두둠칫도 공연을 약속했는데, 공연 장소에 도착해서야 문화제가 취소됐음을 알았다. 당황도 잠시. 두둠칫은 그날 두 분의 고공농성자만을 위해 전광판을 올려다보며 춤을 추었다. 두둠칫의 역사적인 첫 연대공연이었다. 약속한 재능교육 투쟁 연대공연이 해고노동자들의 복직합의가 성사되어 취소된 기쁜 기억도 있다.

서울중앙우체국 전광판에서 고공농성 중인 강세웅(LG유플러스 비정규직지부 조합원) · 장연의(SK브로드밴드 비정규직지부 연대팀장)씨를 위한 공연을 마치고, 전광판을 향해 "강세웅 장연의 투쟁"이라고 쓴 손팻말을 들어 보이는 두둠칫(사진: 백상진 두둠칫 매니저)

서울중앙우체국 전광판에서 고공농성 중인 강세웅(LG유플러스 비정규직지부 조합원) · 장연의(SK브로드밴드 비정규직지부 연대팀장)씨를 위한 공연을 마치고, 전광판을 향해 “강세웅 장연의 투쟁”이라고 쓴 손팻말을 들어 보이는 두둠칫 (사진: 백상진 두둠칫 매니저)

그 모습을 전광판 위에서 찍은 사진 (사진: 강세웅 조합원)

그 모습을 전광판 위에서 찍은 사진 (사진: 강세웅 조합원)

연대요청이 들어올 때마다 매번 공연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득이하게 공연이 취소돼는 때고 있고, 바쁜 단원들이 시간을 내어 공연을 하다 보니 시간이 맞지 않아 요청에 응할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않도록 “여건이 되면 춤춘다”라는 원칙을 세웠다.

이렇듯 넘치는 열정과 더불어 치밀함까지 지닌 두둠칫이지만, 아직까지는 ‘몸치’패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는 듯하다. 두둠칫의 공연은 여전히 감탄사보다 웃음을 더 많이 자아낸다. 날카롭고 정확한 동작, 일사불란한 멋은 없을지라도 두둠칫의 공연장에는 항상 웃음이 있다. 지치고 힘든 농성장에서, 많은 분들이 두둠칫을 보고 웃으며 좋아해주시니 큰 보람을 느낀다.

 

두둠칫, 콜트콜텍 기타노동자의 친구가 되다

 

모든 연대공연이 소중하지만, 특히 공연이 잘 되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춤을 추면서도 즐겁고, 동작이 평소보다 잘 맞는 것 같고, 무엇보다 관객들의 표정이 밝을 때다. 지난 11월 3일에 진행한 콜트콜텍 연대공연이 그랬다.

11월 3일은 ‘콜트콜텍 기타노동자 친구들의 집중행동의 날’이었다. 이날은 콜트콜텍의 노동자들이 ‘미래에 있을지도 모르는 경영위기’ 때문에 해고된 지 3200일 가까이 지난 날이자, 새누리당의 노동개악 추진과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김무성의 근거 없는 비방에 맞서 방종운 콜트악기 지회장이 단식 노숙농성을 시작한 지 30일이 지난 날이었다. 많은 당원들이 연대하기 위해 농성장이 있는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 모였다.

콜트콜텍 투쟁을 지지하는 두둠칫의 캐릭터 '냥아치' (캐릭터 제작: 쥰쨩 두둠칫 단원)

콜트콜텍 투쟁을 지지하는 두둠칫의 캐릭터 ‘냥아치’ (캐릭터 제작: 쥰쨩 두둠칫 단원)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정리해고 투쟁사업장. 한 노동자의 30일의 단식. 듣기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문구들이다. 사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존재들이 사람이 되기 위해 싸워온 시간이었다. 자본과 정권에 대항하는 노동자가 목숨을 걸고 차지찬 아스팔트 위에 앉아있었다.

두둠칫은 오후 일곱 시부터 시작되는 ‘연대의 밤 문화제’에서 공연을 했다. 무거운 싸움의 현장에 우리 같은 몸치패가 어울릴까 걱정하기도 했지만, 걱정과 달리 현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여섯 명의 두둠칫이 무대에 올라, <바위처럼> <새물> <단결투쟁가>에 맞춰 연달아 춤을 추었다. 문화제 참가자들은 곳곳에서 웃음을 터트리면서도, 노래를 함께 다라 부르며 우리를 응원해주었다. 현장의 분위기는 점점 더 달아올랐다. 환호를 받으며 무대를 내려올 때에는, 몸이 뜨거워진 만큼 마음도 뜨거웠다. 엄청난 일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의 연대가 여기 모인 이들을 웃게 만들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얼굴에 웃음꽃을 한번 피웠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우리는 멋진 춤 동작을 보여주지도, 일사불란한 단결력을 보여주지도 못하지만, 우리의 춤에는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투쟁을 응원하는 마음이 담겼다. 두둠칫의 이런 마음이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전달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날의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콜트콜텍 기타노동자 친구들의 집중행동의 날' 문화제에서 공연 중인 두둠칫. 이날도 두둠칫은 '몸치'패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사진: 나동혁 두둠칫 단원)

‘콜트콜텍 기타노동자 친구들의 집중행동의 날’ 문화제에서 공연 중인 두둠칫. 이날도 두둠칫은 ‘몸치’패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사진: 나동혁 두둠칫 단원)

두둠칫이 춤을 춘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민중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의 착취와 차별, 배제와 사우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두둠칫은 춤을 멈출 수 없다. 두둠칫의 춤을 보며 누군가가 웃을 수 있다면, 더불어 노동당의 이름을 한 번이라도 더 떠올릴 수 있다면, 우리는 여건이 되는 한 즐겁게 춤을 출 것이다. 우리의 춤이 이 사회를 바꾸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그래서 노동당이 꿈꾸는 세상을 향해 한걸음 더 내딛을 수 있기를, <새물>의 노랫말처럼 우리가 “조금씩 내딛는 한걸음”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걸음이 되기를 바란다. 두둠칫은 노동당의 당원으로서 기꺼이 그 길에 함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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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을 돌아보다

[2015.12 제26호 특집]

유신을 돌아보다

 

 

근래에 들어와 ‘유신’이란 말이 정치적 공간에 심심찮게 불려나온다. 박정희의 생물학적 딸인 박근혜가 이 나라를 통치 중인데다, 그녀가 보이는 행보가 유신독재체제의 그것과 상당히 닮아 있어서일 테다. 누군가는 ‘이러다 한국 사회가 유신시대로 되돌아가는 거 아니냐’는 걱정을 하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끝이 난 듯 보였지만, ‘유신’은 우리 사회에서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다. 그림자처럼, 유령처럼 우리 사회의 정치·사회·문화 영역 곳곳에 지금도 들러붙어 있다. 우리에게 ‘유신’은 과거가 아니다. 우리는 ‘유신’을 완전히 떨쳐내고 지금의 체제를 넘어설 수 있을까? 다른 체제는 가능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