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간혹 볼 수 있는 신좌파 집회

먼 좌파 이웃 좌파 ③ 이웃 나라 일본의 좌파 (1)

[2013.10 제2호 먼 좌파 이웃 좌파 ③]

이웃 나라 일본의 좌파 (1)

 

장석준|부대표

 

 

 

실종된 동아시아 국제연대의 전통

 

좌파 정치의 오랜 미덕 중 하나는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국제연대의 전통이다. 동아시아에도 20세기 전반에는 이런 전통이 살아 있었다. 우리 항일혁명운도사만 봐도 중국, 일본의 좌파와 연대하여 동아시아 전체의 변혁을 위해 싸운 선배들의 기록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좌파 정당들은 자국 정치의 맥락 안에 갇혀 있을뿐더러 교류도 활발하지 않다.

더구나 동아시아가 점점 더 지구 자본주의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데 반해 이 지역의 좌파정치는 오히려 과거보다 쇠퇴하는 양상이다. 무엇보다 점점 더 우경화하는 일본 정치가 그런 인상을 던져준다.

 

오래된 일본의 좌파 정치의 역사

 

일본은 본래 뿌리 깊은 좌파 정치의 전통을 지니고 있다. 1920년대에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의 성장을 바탕으로 좌파 대중정당들(흔히 ‘혁신정당’ 이라 불렸다)이 활발하게 등장했다. 사회민중당, 일본사회당 그리고 노동자농민당이 그런 정당들이었다. 남성 보통선거제가 도입된 덕분에 이들 정당은 의회에 진출해 활동하기도 했다. 조지 O. 타튼의 『일본의 사회민주주의 운동』[한울, 1997]을 보면, 당시 이들의 활동상을 생생히 접할 수 있다. 다만 공산당만은 철저히 탄압 받았다. 천황제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패전 이후 한 동안은 좌파 정치의 전성기였다. 전쟁 전의 혁신정당 흐름들이 결집해 사회당을 창당했고, 공산당도 드디어 활동의 자유를 얻었다. 우파가 전쟁 책임을 지고 있었던데다가 패전 후 비약적으로 성장한 대중운동 덕분에 사회당, 공산당 모두 전에 없던 인기를 누렸다. 1947년에는 사회당의 가타야마 데쓰 총리가 이끄는 좌우연정이 들어서기도 했다.

1960년대 신좌파 학생들의 가두 투쟁 모습

1960년대 신좌파 학생들의 가두 투쟁 모습

이 시기를 다룬 책으로는 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 :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일본과 일본인』[최은석 옮김, 민음사, 2009]이 좋다.

이 짧은 전성기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냉전 체제가 자리 잡으면서 곧 끝나버렸다. 하지만 이후에도 한동안 좌파는 일본 사회의 무시할 수 없는 주요 축이었다. 원내에서는 사회당이 늘 1/3 이상의 의석을 점하며 자유민주당의 냉전 드라이브를 막았다. 노동조합운동도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전투적 기풍을 견지했다. 무엇보다 1950년대-60년대 내내 학생운동이 활발히 지속됐고 그래서 좌파 청년 세대가 끊임없이 배출됐다.

 

지나친 총평 의존 속에 조로한 일본 사회당

 

문제는 좌파 전반의 부족(部族)화에 있었다. 여기에는 주류 좌파의 책임도 있었고, 신좌파 세대의 문제도 있었다. 우선 사회당은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약칭 총평)의 배타적 지지 방침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거 때마다 노동자들의 몰표를 받기는 해지만, 당 자체의 기반은 극히 취약했다. 제1야당임에도 불구하고 당원 수는 전성기이던 1960년대 말에 3만 명에 불과했다. 굳이 당원을 확대하지 않아도 총평이 조직과 재정을 책임져줬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 내 좌파, 그 중에서도 ‘사회주의협회’ 라는 정파가 당의 골간을 장악했는데, 그들은 낡은 교조적 마르크스주의를 추종했다. 사회주의협회의 노선은 일본 자본주의의 발전 상황과도 맞지 않았고 신좌파 청년들에게도 별로 매력이 없었다. 그래서 서유럽의 신좌파 세대가 1970년대를 거치며 주류 좌파 정당에 입당해 당 내 좌파 흐름을 강화한 것과 달리 일본에서는 사회당이 조로(早老)해 버리고 말았다. (사회당을 포함해 전후 일본 정치 전반에 대한 개론서로는, 야마구치 지로 외, 『일본 전후정치사』[박정진 옮김, 후마니타스, 2006]이 좋다.)

 

스탈린주의의 유산, 공산당의 자폐성과 신좌파의 정파주의

 

한편 공산당 역시 자폐적 성격이 강했다. 공산당은 한국전쟁 시기에 농촌 게릴라 전술을 추진해 일본사회에서 고립된 적도 있지만, 이후 ‘인민적 의회주의’ 라는 이름 아래 대중 정치의 길을 꾸준히 개척해왔다. 사회당과는 달리, 일간지 <아카하타(赤旗)>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조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산당은 스탈린주의를 부정하기는 했지만 스탈린주의의 어떤 요소들, 가령 ‘무오류의 전위정당’ 신화를 버리지는 못했다. 그래서 과거 일본 공산당이 범한 여러 오류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공산당 정통론을 고집하는 측면이 있다. 국내에도 DVD가 나온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영화 『일본의 밤과 안개』(1960년작)를 보면, 이런 분위기를 실감할 수 있다(한편 참고할만한 책으로는 고야마 히로타케의 <전후 일본의 공산당사 : 당내 투쟁의 역사>[최종길 옮김, 어문학사, 2012]가 있다.) 이런 태도가 공산당과 신좌파 사이의 균열과 대립을 낳았다. 나중에는 아예 서로 폭력을 행사하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이탈리아 공산당이 신좌파와 긴장을 빚으면서도 그 에너지를 흡수해 1970년대에 한때 집권 목전까지 갔던 것 과는 사뭇 다르다.

일본에도 1956년 소련 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의 죄상이 폭로되고 곧이어 헝가리 혁명이 일어나자 공산당에서 이탈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신좌파가 형성됐다. 그 자신 신좌파운동 참여자였던 가라타니 고진은 대답집 『정치를 말하다』[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2010]에서 당시 분위기를 실감나게 전한다. 숫자로만 따지면, 일본의 신좌파 세대도 프랑스나 이탈리아, 서독에 못지 않았다.

흔히 서유럽에 비해 일본 신좌파는 너무 커다란 패배를 겪어서 이후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하는데, 사실 패배한 걸로는 서독도 마찬가지였다.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서독 신좌파의 상당수는 1970년대 후반 녹색당 건설 운동에 합류해 대중 정치의 새 흐름을 만들었던 데 반해 일본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가장 커다란 이유는 일본 신좌파 사이에 유독 심했던 정파주의였다. 어찌 보면 공산당의 스탈린주의 문화가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며 등장한 신좌파 세대에게도 고스란히 반복된 셈이었다.

일본 신좌파 정파들 중 하나인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혁마르파 집회

일본 신좌파 정파들 중 하나인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혁마르파 집회

신좌파등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사례이기는 하지만 연합적군파의 아사마 산장 사건을 분석한 퍼트리샤 스테인호프의 『적군파 : 내부폭력의 사회심리학』[임정은 옮김, 교양인 2013]에 그 충격적인 양상이 소개돼 있다. 신좌파 세대가 일본 사회에서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파 간 폭력 사태로까지 치달은 병적인 정파주의(그에 비하면 한국 운동권의 정파주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때문에 세력화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나마 진지하게 방향 전환을 모색한 이들도, 비록 생활협동조합이나 지역운동에 뿌리를 내리기는 했지만, 전국적 정치 흐름을 만들지는 못했다. (신좌파 일부가 생협운동 등으로 전환하는 과정은 요코다 카쓰미, 『어리석은 나라의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시민 : 생활클럽 운동그룹과 풀뿌리 민주주의 운동의 모델 만들기』[나일경 옮김, 논형, 2004]에 잘 소개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에 일본 정치에는 우경화의 쓰나미가 밀려온다. 마치 우리의 지난 몇 년을 연상시키는 사태가 일본 좌파를 덮쳤고, 그 결과가 지금의 우경화한 일본 정치 지형이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