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자의 재집권(?)

[2015.11 제25호 먼 좌파 이웃 좌파]

시리자의 재집권(?)

 

안효상|편집위원

 

 

 

브레히트가 《갈릴레오의 생애》에서 쓴 “이성의 승리는 이성적 사람들의 승리이다”라는 말은 직설법 문장임에도 현실의 무자비한 힘을 고려할 때 두 가지 점에서 재검토되어야 한다. 과연 이성이 승리하는가? 그리고 이성적인 사람들은 누구인가?

 

환상으로 부서진 이성

 

올해 초 그리스 총선에서 시리자가 승리했을 때 그 기쁨을 떠받친 것은 ‘반긴축’이라는 분명한 대안이었다. 이는 당연하게도 2010년부터 시작된 구제금융이 낳은 반민중적 효과를 교정하려는 급진좌파의 ‘이성적인 결론’이었고, 이에 대중이 호응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시리자는 이성적인 사람들로 등장했다. 그 이후 이 이성적인 사람들은 유로그룹과의 협상에서도 이성적인 태도로 임했다. 이들은 유로존에서 나가지 않으면서도 긴축기조를 제거함으로써 그리스 민중의 삶을 돌려놓으려 했다.

하지만 후일 바루파키스 전 재무장관 등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 협상 과정은 전혀 이성적이지 않았다. 그리스에 가혹한 구제금융 조건을 강요할 경우 민중의 삶은 완전히 파탄날 것이라는 인도주의적 호소, 또한 이를 막기 위해 불가피하게 그렉시트를 할 경우에는 유로존 자체가 위기가 빠질 것이라는 이성적인 예측에 기초한 설득 모두가 채권자들의 이해관계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고, 결국 시리자는 굴복했다.

물론 그리스 민중의 지지를 받아 권력의 자리에 오른 시리자가 그냥 굴복할 수는 없었다. 부채탕감은 없이 더 많은 긴축만이 있을 뿐인 채권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일지 말지를 두고 치프라스 총리는 국민투표라는 수단을 동원했다. 이때 그리스 민중은 다시 한 번 이성적인 선택을 했다. 제3차 구제금융 협상안에 반대하는 것은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나간다는 뜻이며, 더 나아가 유럽연합에서 탈퇴한다는 의미라는 유럽과 그리스 내 우파언론의 집중포화에도 불구하고 투표자의 61퍼센트가 반대(OXI)를 선택했고, 그럼으로써 이들은 인간의 존엄한 삶을 지키겠다고 뜻을 모았다. 이렇게 1월 25일은 7월 5일로 이어졌다.

사진1: 그리스 구제금융 국민투표를 앞두고 거리에 나란히 붙은 구제금융 협상안 찬성(NAI) / 반대(OXI) 홍보포스터

사진2: 7월 5일 시행한 구제금융 국민투표 결과. 전체 투표율 62.5퍼센트 중 투표자의 61퍼센트가 구제금융 협상안 반대에, 39퍼센트가 찬성에 투표했다.

그런데 치프라스 총리는 이런 국민투표를 한낱 에피소드로 만드는 데 한시도 주저하지 않았다. 제3차 구제금융 협상안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미 채권단에 굴복했던 치프라스는 국민투표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이 이성적인 사람인 체 했다. 유로존에서 나가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며, 협상안을 받아들이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는 것이 그의 이성이었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그가 이런 태도를 취한 이유가 (좌파) 유럽주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탈퇴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적절한 방법이다. 사실 유로존이 출범할 때부터, 서로 다른 경제적 힘이 있는 나라들을 하나의 공통 통화로 묶을 경우 개별국가가 경제적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적절한 통화정책을 취할 수 없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여기에 더해, 특히 독일의 요구로 엄격한 재정정책까지 요구되었기 때문에 개별국가는 경제운영과 관련해서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리스는 이런 유로존의 문제점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곳일 뿐이다.

물론 유럽연합으로 표현된 유럽통합은 전쟁을 억지하고 공동의 번영을 가져오겠다는 이상으로 추동되었다. 20세기 전반에 민족들 간의 경쟁에 따른 두 차례의 참혹한 전쟁을 겪은 유럽으로서는 어쩌면 다른 선택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의 유럽연합과 유로존은 주로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구현하는 제도로서 기능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전쟁 억지와 공동 번영이 아니라 도리어 국내외의 갈등을 부추기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그렉시트, 즉 개별국가가 경제와 통화 발행에 대한 주권을 회복하는 것이 겉보기에는 후퇴처럼 보이지만 지금의 난제를 해결하는 우회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이렇게 또 다른 이성이 있었고,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 수는 아니지만 치프라스의 노선에 반대하여 시리자를 나갔다. 이로 인해 시리자-그리스독립당 연립정권은 재구성되어야 했고, 8월 20일 치프라스 총리가 사임하면서 조기 총선이 열리게 되었다.

 

환상 속의 이성

 

유로존을 탈퇴하겠다는 실질적인 계획이 없이는 구제금융을 둘러싼 협상조차 제대로 하기 어려운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치프라스나 시리자 정부 내 유럽주의 온건파가 그런 상황이었고, 그 결과는 앞서도 말했듯이 굴복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드러나지 않았거나 조심스럽게만 말해졌지만, 그런 계획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시리자 내 좌파그룹인 ‘좌파 플랫폼’의 코스타스 라파비차스의 계획안이었다. 올봄에 라파비차스는 독일의 동료 경제학자인 하이너 플라스벡과 함께 <그리스를 위한 사회적·민족적 구조 프로그램>을 작성했다. 이 프로그램은 유럽통화동맹 내에서는 부채탕감, 긴축제거, 회원국 자격 유지 세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한다. 이른바 “불가능한 3요소”이다. 따라서 민중의 삶을 우선시하는 급진적인 정부라면 앞의 두 가지, 즉 부채탕감과 긴축제거를 선택해야 한다고 이 프로그램은 권고한다.

 

사진3: 코스타스 라파비차스 (Costas Lapavitsas)

 

이에 따라 통합된 방책들로는 “부채를 탕감하고, 균형예산을 거부하며, 은행을 국유화하고, 조세개혁을 통해 소득과 부를 재분배하고, 최저임금을 인상하며, 노동관계 법률을 회복하고, 공공투자를 늘리며,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의 관계를 재규정하는 것”을 든다. 또한 이러한 방책들은 유로존이라는 엄격한 틀 내에서는 채택할 수 없는 것이므로 국가통화를 재도입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유럽통화동맹에서 나오는 과정을 29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런데 당시에 이 프로그램은 공적토론이라는 연옥에조차 끼어들 수 없었다. 저마다 이유는 다르지만 좌우를 막론하고 그리스 정치계급 모두가 통화동맹에서 나간다는 것을 꿈조차 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치프라스 등 시리자 주류가 이성이라는 무기로 채권단을 설득하려 했기 때문이고, 아직 그리스 국민 다수가 이에 희망을 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6월말에 구제금융 협상안이 나왔을 때 환상은 깨졌고, ‘반대’라는 이성이 공적인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치프라스는 이를 다시 자신의 환상적인 이성으로 바꿔치기했다. 그리고 여기에 저항하는 또 다른 이성적인 사람들은 8월에 ‘민중연합’을 구성했다.

민중연합은 시리자 내 좌파 플랫폼 출신 사람들을 중심으로 해서 치프라스의 ‘투항’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만든 정치연합이었다. 이들이 모인 구심점은 원래 시리자가 했던 약속, 즉 긴축정책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라파비차스의 프로그램에서 제시된 유로존 탈퇴 및 경제적 주권 회복이다.

앞서 말한 “불가능한 3요소”를 고려하면 이성적인 선택이고, 적절한 대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9월 20일 조기 총선의 결과는 또 다른 이성의 시간이 도래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성과 환상의 교착

 

9월 20일에 있었던 선거 결과, 시리자는 35.5퍼센트를 득표해서 전체 300석 가운데 145석을 획득했다. 지난 번 정부에서 연정을 한 그리스독립당은 3.7퍼센트 득표로 10석을 얻었다. 두 당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연정을 구성했다.

하지만 이런 선거 결과만큼이나 눈에 띄는 것은 56.6퍼센트에 머무른 투표율이다. 이는 1974년 민주화 이래 가장 낮은 투표율이며, 지난 1월 총선의 63.6퍼센트와도 비교되는 수치이다. 이는 국민투표 결과가 손쉽게 뒤집히는 것을 눈앞에서 본 대중이 정치에 무관심해지는 탈정치화 혹은 비정치화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신민당, 사회당, 공산당 등의 기존 정당은 비슷한 결과를 얻었지만, 새로이 반긴축을 내건 민중연합은 2.9퍼센트를 얻어 의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는 절대적 시간 부족이라는 상황적 요인과 이른바 ‘플랜 B’를 분명하게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민중연합의 일부는 앞서 살펴본 프로그램을 분명하게 자기주장으로 삼고는 있지만 이를 대중적인 의제로 아직 구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투표에 나선 그리스 국민은 최선은 물론 아니고 차선도 아닌 차악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이때 기준은 누가 분명한 대안을 제시하느냐가 아니고 그저 현 상황을 누가 더 잘 관리할 수 있는가이다. 이렇게 시리자는 재집권했다. 이런 점에서 지금은 교착상태이다.

물론 시리자의 재집권을 정권의 연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지난 1월 총선부터 8월말 치프라스가 사임할 때까지 시리자가 보여준 궤적은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이자 경제위기 시기의 ‘개혁주의’가 헤라클레스의 과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개별국가가 기존의 위치를 지키면서 어느 정도의 경제적 주권을 발휘해서 민중의 존엄한 삶을 지키려는 시도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방파제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질 운명이라는 것이다.

 

사진4: 9월 20일 조기총선에서 시리자가 승리함으로써 총리로 재신임을 받은 치프라스

 

그렇다고 간단하게 국제주의를 주장한다고 될 일은 아닌데, 왜냐하면 그 구체적인 계기를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지 공허한 슬로건을 말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현재 그리스의 상황을 보면 그런 계기가 아주 멀 것 같지는 않다. 지난 5년 동안 그리스는 긴축정책으로 인해 대다수의 소득이 격감했고, 그 결과 전체 3분의 1 이상이 빈곤선 아래에서 말 그대로 연명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리자-그리스독립당 연립정부는 10월 16일에 구제금융의 조건이 되는 첫 번째 긴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아마 어려운 상황이 지속될 것이다.

물론 집권 시리자는 조세개혁과 부패척결로 상황을 돌파하려고 한다. 하지만 부패와 낮은 세금이 그리스 상층 엘리트가 그동안 이윤을 확보해온 일상적 방식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쉬운 과제가 아니다. 게다가 유로존 통합 이후 그리스에 투자한 유럽자본은 기존 체제에 끼어드는 방식으로 일을 벌였기 때문에 이런 개혁에 찬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제3차 구제금융에 따른 긴축안이 효과를 발휘할 때 다시금 민중적 저항이 벌어질 수밖에 없을 테고, 여기에 누가 이성적인 대안을 제출하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다. 물론 이때의 대안은 무조건적인 유럽주의를 버리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럴 때 나머지 유럽의 좌파가 어떻게 호응할지는 또 다른 문제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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