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약1_오오극장

오오극장에 판타지는 없다

[2016.12 제26호 화요일의 약속]

오오극장에 판타지는 없다

한상훈 대구 민예총 사무처장

 

사진·글|현린 편집위원, 문화예술위원장

 

 

 

대구에 하나밖에 없다는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에서 나는 영화 대신 한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가깝게는 그 날의 오오극장에 관하여, 멀게는 백 년 전 대구역에 관하여 세 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각자 다른 시간을 산다. 누군가는 타임라인을 따라 숨 가쁘게 달리고 있지만, 또 누군가는 백 년 전 어느 시간에 머물러 있다. 그 때문일 것이다. 어느 누구도 상대를 배신하지 않았는데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배신당했다고 느끼는 이유는. 실제로 우리를 배신한 것은 앞에 있는 그 상대가 아니라 자신의 속도가 만들어 낸 상대에 대한 ‘판타지’였을 뿐인데도 우리는 자신의 속도를 높이려고도 낮추려고도 하지 않고 다만 상대에게 배신자라는 딱지를 붙이기 바쁘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고속열차 안에서 깜깜한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했다. 아무도 속도를 높이거나 낮추려고 하지 않을 때 서로를 다시 만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문득 떠오른 한 음절 단어에 나는 웃었다.

 

예술대학이 가장 많은 도시, 대구

 

미래에서 온 편지(이하 미) : 여기 오오극장이라는 곳은 언제 만들었나?

한상훈(이하 한) : 독립영화가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대구에는 그 영화들을 보여줄 공간이 없었다. 서울에는 세 개 정도 있지만 서울 외 지역은 여기가 처음이다. 대구에서 가장 빨리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지역은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지원을 바라고 있었지만, 대구는 절대로 (지원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서 그냥 우리가 직접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구경북독립영화협회, 미디어핀다, 대구 민예총, 세 군데가 설립추진단체가 되어 영화관 의자 한 석을 50만 원씩에 팔고, 1만 원, 2만 원씩 후원금을 모았다.

큰 극장들이 판타지나 스펙터클을 보여준다면, 오오극장은 자기 이야기를 보여준다. 김성근 감독이 나오는 《파울볼》(2014) 같은 영화는 야구부에서 많이 보러 오고, 호스피스에 관한 영화를 상영하면 호스피스 할머니들이 30년 만에 영화를 보러 오는 식이다. 그래서 내년에는 보잘것없는 영화라도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영화를 더 많이 상영할 계획이다. ‘내 인생의 영화’라는 타이틀로, 구두닦이 아저씨가 좋아했던 영화가 있으면 그 아저씨를 초대해서 토크쇼를 하고 상영을 하고 싶다.

 

화약2_오오극장 내부

오오극장 내부

 

미 : 대구는 인디문화도 활성화되었고, 문화적으로 풍요로워 보인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한 : 대구는 일제가 병참기지로 쓰기 위해 만든 계획도시였고, 부자들이 많았다. 대구가 한국 사진의 중심도시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사진이 무척 비싼 예술 아닌가. 사진기가 집 한 채 값이었는데, 그런 사진기를 가진 사람이 많았다. 현대미술작품도 많이 거래될 만큼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고, 이를 기반으로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계명대부터 시작해서 예술 관련 대학들도 많다. 서울을 제외하고는 예술대학이 가장 많은 도시가 대구일 것이다.

사상적으로도 자유로운 지대였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다른 지역은 점령군에 따라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면서 학살도 벌어지고 했지만, 인민군이 대구까지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밖에서 보면 대구가 보수도시라고 생각하지만, 대구에서 진보단체들이 집회한다고 탄압하거나 하지 않는다.

민예총 전신으로 ‘예술마당 솔’이라는 단체가 있었는데, 대중강좌와 문화재 탐방 같은, 당시로서는 진보적이면서도 대중적인 사업을 워낙 잘 했다. 유홍준 선생의 《나의 문화 유산답사기》도 그 결과물이었다. 요즘 구도심 살리기, 골목투어 많이 하지 않나? 그걸 제일 먼저 했던 곳도 대구다. 거리문화시민연대의 권상구씨라고, 우리가 봤을 때 심각한 오타쿠인데, 이 양반이 20년 동안 골방에서 일본서적, 미국서적 들춰가며 대구근대사 연구를 했다. 그 양반이 하면서 이슈가 되고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 삶 안에서, 이 시장 안에서 대안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미 : 민예총에서는 언제, 어떻게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가?

한 : 민예총에는 2003~2004년 즈음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민예총 소식지 내는 거 도와달라고 해서 편집간사로 들어왔다. 민예총 하기 전에 유시민 씨가 했던 개혁국민정당의 대구 실무자로 일했다. 대구지하철참사 대책위에서 활동했고 단병호, 심상정 씨가 의회로 진출한 선거에서는 민주노동당 선거운동을 했다. 그 후 대구 민예총 사무처장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한 10년은 된 거 같다.

미 : 학교 다닐 때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나?

한 : 대학 들어가기 전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형 영향이 컸다. 형이 91학번인데 학생운동을 했다. 하지만 정작 대학 가서는 운동을 안 했다. 총장퇴진운동이 일어났는데, 선배들이 수업 거부하고 집회 나가라고 했다. 왜 나가야 하는지 설명을 요구했더니 화를 내고 욕을 하더라. 그 선배의 태도가 자기가 싸우겠다는 사람들의 그것과 너무 같다고 생각했다. 기본이 안 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안 따라 나갔다. 그 뒤 내가 영화동아리 회장을 할 때 자신들이 인권영화제를 하겠다고 해서 프로그램 만들고 상영까지 해줬는데, 약속했던 비용을 떼먹더라. 당시 교내 운동권들은 문제가 있었고, 같이 어울리기 싫었다.

미 : 예총이 대학에서 예술을 전공했던 사람들 위주였다면, 민예총은 동아리 활동을 했던 사람들 위주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때문에 민예총이 진보적 문화예술 활동을 많이 할 수 있었고. 그런데 지금은 예총과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민예총이 보수화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한 : 예총 입장에서 봤을 때 민예총은 아마추어였다. 하지만 예총에 기술자들이 많았다면, 민예총에는 기획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예총 행사 기획을 민예총에 맡기기도 했었다. 보수화 문제는, 민예총이 30년 됐다. 어떤 조직이든 30년 동안 한 조직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보수 아닌가? 그리고 민예총의 ‘민족예술’ 주창한 사람이 김지하였다. 그걸 주창한 사람이 맛이 갔는데 이 단체가 맛이 안 가는 게 이상하지 않나?(웃음) 대구 민예총도 94년에 생겨서 20년 정도 됐다. 바꿔야 할 것이 많다.
저항예술제를 제안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민예총에서 민족예술제라는 축제를 매년 했는데, 자기위안용의 초라한 축제였다. 민예총 멤버들이 올드해졌으면, 본인들이 끼지는 않더라도 젊은 예술가들의 저항성을 보여줄 수 있는 판을 깔아주고 그걸 확장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화약3_저항예술제

2015년 8월에 열린 제1회 저항예술제

 

미 : 저항예술제가 과연 저항적이었는가라는 비판도 있었다. 특히 박근혜 패러디에 관해서는 과연 패러디인지 단순한 모방이었는지 알 수 없다는 지적이 있었다.

한 : 그런 평가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구에서 비슷한 행사를 했었는데, 실패해도 괜찮다는 개념으로 진행했다. 예술가들을 보면, 관객들 적게 와서 지원금 못 받으면 어쩌나, 이런 거 해보고 싶은데 망하면 어쩌나 걱정이 많다. 그런 걱정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실험하고, 그 안에서 서로 통하는 동류들을 만나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만들고 싶었다.

사실 민중미술이라는 게 중간에 길을 잃었다. 민중미술이 과거에는 사회주의 혁명 전선을 위해 복무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민중미술가의 삶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이 삶 안에서, 이 시장 안에서 대안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아직까지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과정으로서 운동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판화가들은 자기 판화에 에디션 번호를 매기지 않았다. 그걸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운동을 하는 거였고, (자신의 판화를) 저잣거리에 사람들이 걸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번호를 매긴다. 팔아야 하니까. 신학철 선생님이 그린, 재벌 목 따는 그림 같은 걸 삼성이 1억 씩 주고 사 간다. 민중미술 화풍 안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니까, 나중에 10억 되고 100억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중미술 하던 선생님들도 시장에 다 편입됐단 얘기다.

이미 큰 싸움에는 졌다. 그 이후에 무엇을 할지가 문제다. 판화라는 게 많이 전파하기 위해서 선택한 매체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요즘의 카드뉴스가 민중미술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조금 리버럴하지만 이철수 선생님 작업이 재미있는 게, 민중미술 화가 중에 유일하게 팬시샵에 작품을 전시한다. 그 안에 옅게나마 메시지들이 들어있다. 나머지 민중미술 화가들의 그림은 거의 다 소위 시민사회 내지 노동계 안에서만 유통된다. 이철수 선생님은 화랑을 거치지 않고 자신이 직접 판다.

예전에 이철수 선생님 전시를 준비하다가 꾸중을 들었다. 전시장에 큰 방과 작은 방이 있었는데, 비용을 아낀다고 작은 방에 에어컨을 안 틀었다. 그랬더니 그러시더라. “운동한다는 생각만 하지 말고 서비스업 한다는 생각도 가져라. 다른 사람은 서비스를 받으러 오는데 너는 운동하고 있잖아.” 전시장에 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런 사람들을 문화예술운동에 젖어들게 하기 위해서 어떤 과정이 있어야 하는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예술’ 자체가 진보적인 활동 … 넓게 만드는 일도, 깊이 파는 일도 하면 된다

 

미 : 과거에는 문화재 탐방이라든가 도시탐방 같은 것을 진보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역마다 지자체나 지역의 문화재단의 지원 아래, 많은 경우 경제적 득실 계산 아래 이런 활동들이 진행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지역의 문화예술사업도 정치적 입장을 보다 선명히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 : 깊이와 넓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전태일문화제의 경우, 선배들이 자문을 부탁했을 때 처음에는 하지 말자고 했다. 저쪽에서 이승복 내세우는 것처럼 이쪽에서 전태일을 내세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신에 더 대중적인 사업을 제안했다. 대구의 대표인물이라고 하면 이병철, 박근혜, 전두환, 노태우 같은 슈퍼히어로 권력자와 재벌 아닌가? 그래서 보통사람의 영웅으로서 전태일을 내세울 수 있겠다 싶었다. 운동권의 언어 ‘전태일 열사’ 이런 말보다는, 48년생이니까 ‘1948년 대구생 전태일’이라고 하고 48년생 대구사람들을 찾아서 그 시절의 이야기, 전태일의 이야기를 같이 하는 것이다.

 

대구 오오극장 갤러리에서 열린 전태일 시전

대구 오오극장 갤러리에서 열린 전태일 시전 <울타리 밖의 전태일>

 

전태일을 가지고 지금의 노동현실에 관해 토론하는 일은 다른 사람이 하면 된다. 그런데 깊어져야 한다면서 넓어지면 안 된다고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넓게 만드는 일도 하고 깊이 파는 일도 하면 된다. 골목투어도 지금 많이 넓어진 건데, 깊어지는 것도 만들면 된다. 하지만 저건 안 된다고 할 필요는 없다. 골목투어는 민중생활사적인 역사를 배우는 과정이다. 위인전기보다 훨씬 낫다. 이게 뾰족하게 보이지 않는다면 뾰족하게 보이는 사업을 하면 된다.

미 : 그런 뾰족한 사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당원들이 아닐까?

한 : 지금 노동당은 너무 슬로건중심 사업밖에 못 하고 있다. 권상구 같은 인물이 왜 중요하냐면, 그가 엄청난 성과를 내고 있는 데다 그 성과를 우파도 활용할 수 있고 좌파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노동당은 그 성과를 낳지는 못하고 활용만 하고 있다. 섹시한 슬로건들은 뽑아내지만 그것들이 빨리 휘발된다는 느낌이다. 지역에서 뿌리내리고 일하려면 어떤 한 영역에서 오랫동안 우물을 파듯이 깊게 파야 하는데, (노동당이 하는 사업은) 지금 우물을 파는 중인데 물을 바로 길어 가는 것과 같다. 골목투어도 ‘전태일 투어’라고 쉽게 이름 붙이고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그 메커니즘을 꾸준히 연구해야 한다. 대개 품이 많이 들어가고 전문적인 영역이다. 그런 일들을 노동당이 붙어서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하는 걸 봐서는 그러지 못할 것 같다.

미 : 민예총에서 활동하면서 정치적 노선으로 고민한 적은 없었나?

한 : 민예총의 정치적인 스펙트럼은 무척 넓다. 새누리당에 가까운 사람부터 사회당보다 더 좌파인 사람까지 다 있다. 그래서 한때는 우리가 전선조직으로서 정치적 정체성을 명확히 해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그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하면 큰 조직이 될 수 없겠더라. 예술인 네트워크로서, 적어도 새누리당은 아니라는 최소한의 지향 정도만 지키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예술’ 자체가 진보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그런 활동을 하는데, 당 색깔이나 이름을 드러내야만 할까 의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지역에서는 서로의 성향을 잘 안다.

그리고 별로 의미 없다고 생각되는 예술가들도 같이 계속 몸으로 부대끼면 바뀐다. 세월호 사안의 경우 그런 성향이 아닌데도 합류한 예술가들이 있었는데, 부대끼면서 신뢰를 쌓으니까 우리 쪽으로 들어오더라. 예술가라는 사람들이 자기 현실을 보면 결국 좌파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은 일반적이지 않고 돈을 많이 못 번다. 정부정책 자체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동질감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 맺기를 잘만 하면, 얼마든지 우리와 좋은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동산업자하고 뭘 하자고 하면 힘들다. 하지만 예술가하고는 그렇지 않다.

 

창작활동을 마음 놓고 할 수 있어야 ‘자립’이다

 

미 : 요즘 예술가들에 대한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지원을 두고 말이 많다. 얼마 되지도 않는 지원금을 가지고 예술가들을 검열하고 통제한다는 비판도 있고, 지자체나 문화재단 좋은 일 하는 데 예술가들이 동원된다는 지적도 있다. 급기야 지원금을 거부하고 자립을 모색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한 : 자립은 판타지라고 생각한다. 진짜 능력 있는 1퍼센트는 자립이 가능하겠으나 나머지는 힘들다. 보통 자립하고 지원금 받지 말자는 분들은 이미 혼자 선 분들인데, 그 분들도 혼자 서기까지의 과정이 있었다. 지금 자립하지 못하고 겸업을 하는 예술가들이 지원금을 받지 않으면 아마 예술 비중을 줄이고 다른 일을 더 할 것이다. 그게 자립인가? 자기 인생에서 자립은 될 수 있겠으나 예술가로서의 자립은 아니다.

진짜 자립이란 정책적인 지원까지 포함한 것이라 생각한다. 관공서에서 돈을 안 받는다고 해서 자립이 아니다. 예술가들의 자립은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산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창작활동을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때를 말한다. 그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은 예술행정가, 예술단체, 예술정책전문가들의 몫이다. 오오극장 만든 것도 악으로 깡으로 한 거다. 그런데 올해 50만 원 씩 낸 사람이 한 60명 되는데, 그 사람들한테 다음에 또 50만 원 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한계가 있다. 그 우물이라는 게 마를까봐 늘 걱정이다.

지금은 예술가를 지원하라고 나온 돈이 누구에게 가야 하는지, 제대로 갈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목소리를 내는 일이 중요하다. 지원금을 받지 않는 게 대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원을 받되 간섭은 받지 않는 체계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권력의 들러리가 아니라 제대로 예술가를 지원할 수 있는 방식들, 예술가들이 이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그 돈을 떳떳하게 받아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제일 좋은 방법은 거리공연을 하더라도 예술가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편적 복지가 안 되는 현재 상황에서는 문화재단을 변화시켜야 한다. 예술가들이 시로부터 직접 지원 받을 때는, 아니꼽긴 했지만 절차가 간소했다. 지금은 시가 재단에 지원사업을 외주로 주고는 감사를 하니까 재단이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대구문화재단이 전국문화재단 평가 1위다. 서류를 너무 잘 만들어서 그렇다. 그런데 그럴수록 예술가는 힘들다. 재단에 민간 인력들이 더 들어가서 재단을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미 : 마지막으로,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활동이 있다면 들려 달라.

한 : 대구에 필요한 단체는 민예총보다도 문화연대 같은 문화예술 관련 정책그룹이라고 생각한다. 민예총에는 생활예술에 대해 전국적인 노선이나 예술교육에 대한 전국적인 노선, 현장예술에 대한 전국적인 노선이 없다. 마을공동체 사업을 한다고 할 때 필요한 ABC를 개발해서 공유해야 한다. 지금은 실제 필요한 일을 못 하고 대선 어떻게 할 거냐, 박근혜 정부 어떻게 할 거냐, 세월호 연장전 어떻게 할 거냐 고민한다. 이런 일을 하는 것도 맞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일상적 탄탄함이 있어야 하는데 그걸 너무 간과하고 있다. 민예총은 이런 걸 하기에 너무 바쁘다. 집중적으로 할 수 있는 별도의 기관이 필요하다.

예술가의 네트워크로 민예총이 아닌 다른 형식을 고민하고 있기도 하다. ‘민족예술’이라고 얘기하기도 힘들고 편견들도 있어서 민예총에 가입하라고 하기 힘들다. 그리고 민예총이 국가에서 원하는 사단법인 체제 하에 있다. 이사장이 있고, 이사가 있고, 피라미드 조직으로 국가가 통솔하기 좋은 형태이다. 예술가하고는 안 맞는다. 예총하고 똑같은 형태로 예총 대응조직을 만들었는데, 하는 일마저 예총 같으면 안 된다. 예술가들이 더 자유롭게 작업할 수 있는 네트워크 조직을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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