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_홍진훤2

더 이상 식판 들고 줄 설 수는 없다

[2015.09·10 제24호(합본호) 화요일의 약속]

더 이상 식판 들고 줄 설 수는 없다

‘지금여기’의 사진가, 홍진훤

 

사진·글|현린 편집위원, 문화예술위원장

 

 

 

<화요일의 약속> 연재를 시작하며

일생 동안 우리는 무수히 많은 화요일을 살아왔고 또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 만큼 대개의 사람들에게 화요일은 월요일 다음 날이란 것 말고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날입니다. 그러나 노동당 당원을 비롯한 세계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적어도 두 화요일, 1818년 5월 5일 화요일과 2017년 11월 7일 화요일은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특별한 날입니다.

우선 1818년 5월 5일 화요일. 2백여 년 전 5월의 첫 화요일은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의 기초를 놓은 칼 마르크스가 태어난 날입니다. 어린이날치고는 아주 특별한 어린이가 태어난 화요일이죠. 1925년 조선공산당 건설을 주도한 ‘화요파’의 명칭도 마르크스가 태어난 화요일을 기념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예, 모두 과거의 일들입니다. 그럼 다음 화요일은 어떤가요?

2017년 11월 7일 화요일. 앞으로 2년 후 11월의 첫 화요일은 1917년 10월 혁명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건설 100주년을 기념하는 화요일입니다. 노동당 당원이자 사회주의자인 당신은 이날 어디서 무엇을 하실 계획인가요? 백 년 전 과거를 기념하는 데 머물지 않고, 백 년 후 미래가 기념할 만한 특별한 화요일로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화요일의 약속’, 줄여서 ‘화약’은 2017년 11월 7일 혁명 백주년 기념일을 말 그대로 불(火)의 요일로, 새로운 미래를 위한 기폭제로 만들자는 약속입니다. 《미래에서 온 편지》는 앞으로 매달 화요일, ‘화약’에 동의하는 좌파 문화예술인들을 만나서 그들이 어떻게 이 미래를 살아왔으며 살고 있는지 묻고 듣고 기록해서 독자들에게 배달합니다.

1945년 9월 조선공산당 재건 70주년을 기념하며
2015년 9월, 현린

 

 

지난 6월 이후 문학계의 최대 쟁점이 표절 논란이었다면, 같은 기간 사진계의 최대 쟁점은 사진상 심사의 공정성 논란이었다. 시작은 제2회 ‘최민식 사진상’ 대상 수상자가 이미 내정되어 있었던 것 아니냐, 일부 수상자가 사진상 운영위원 또는 심사위원과 사제지간 아니었느냐는 심사절차에 관한 논란이었다. 그러다 지금은 최민식 사진상이 표방하는 ‘인본주의 다큐멘터리 사진’이란 과연 무엇이냐는 개념 논쟁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최민식이라는 사진가의 인지도와 3천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상금 때문이었는지, SNS에서부터 시작된 논란은 일간지와 사진잡지를 통해 일파만파 퍼져 나갔고, 사진계에 한 발이라도 담그고 있다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보인 청년 사진가들의 반응이 흥미로웠다. 다들 어려운 조건에서 사진작업을 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청년 사진가들은 특별히 더 열악한 환경에 있다. 전업으로 자신의 사진작업을 하는 것은 이들에겐 꿈도 못 꿀 일. 대개는 아르바이트로 생계와 작업에 필요한 돈을 벌고, 각종 공모전이나 지원금 앞에 줄을 설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이들이야말로 이런 사진상 논란에 가장 민감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의외로 이들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청년 사진가 홍진훤의 표현을 빌자면, “분노의 타임라인을 접하고 우리가 내뱉은 일성”은 “우리도 분노하고 싶다!”였다. 하지만 ‘사피아(사진 마피아)’라 불리는 사진권력으로부터 워낙 떨어져 있어서인지 그들로서는 이 논란을 달구는 분노의 근거를 알 수조차 없었다. “사진판이 온통 분노로 뒤덮여 있는데 우리는 무엇에 분노해야 하는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그들로서는 관심을 가지려야 가질 수도 없었고 논쟁에 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 이 논란을 계기로 그들만의 대안을 모색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첫 번째 ‘화요일의 약속’은 사진가 홍진훤과 했다. 우선, 청년 사진가들이 어떤 대안을 모색 중인지 궁금했다. 더불어 디지털 카메라에 이어 카메라폰이 대중화됨으로써 전 국민이 사진작가라는 말도 나오는 시절에, 정작 사진을 업으로 삼는 청년 사진가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화요일의 약속’인 만큼, 9월 가을햇살이 가득했던 어느 화요일, 종로구 창신동 해발고도 70미터에 위치한 대안공간 ‘지금여기’를 찾았다.

 

밥줄로부터의 이탈

 

미래에서 온 편지(이하 미): 요즘 모든 국민이 사진작가라고들 한다. 사진을 업으로 삼는 작가 입장에서 이 말에 동의하는가?

화요일_홍진훤4홍진훤(이하 홍):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작업을 하느냐에 달렸다고 본다. 한국에서 완벽한 전업 작가는 손에 꼽는다. 내게는 프로와 아마추어란 말 자체도 손 오그라드는 말이다. 아무래도 그런 차이는 있다. 사진을 삶의 중심에 두고 고민하고 사는 사람과 사진을 부수적으로 하는 사람의 차이 같은 것. 하지만 작업이 좋으면 된다고 본다.

미: 그런 면에서 사진가 최민식은 특별하다. 그 자신은 주류 사진가가 아니었지만, 많은 사진가들에게 롤 모델이 되어왔다. 또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민식 사진상’이 만들어졌고 그 운영과 심사를 다시 사진계의 주류가 맡고 있다. 이번 논란도 결국 주류와 비주류 사이, 중심과 변방 사이의 권력투쟁이 핵심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작 비주류에 속한다고 할 젊은 사진가들의 반응이 시큰둥하다. 왜 그렇다고 보는가?

홍: 최민식 사진에 빚지지 않은 사진가가 있을까? 지금에 와서 그 사진이 저항적이냐 아니냐 하는 건 별개의 문제이고, 그 시절에 그런 사진(작업)을 올곧게 했다는 점은 기릴 만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최민식 사진상’에 공모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최민식의 인본주의 사진철학 운운할 때부터 이건 우리와 상관없는 상이구나 직감했다. 실제로 주변의 젊은 사진가 대부분이 응모조차 하지 않은 걸로 안다. 그리고 첫 수상자가 워낙 전통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가였다. 그 뒤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다 이런 논란이 터졌고, 이 글 저 글 다 읽어 봤다. SNS가 어마어마한 분노로 가득한데 관심을 안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분노의 근거가 없었다. 사진상 운영진이 잘 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이렇게 들고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궁금해서 기자들한테도, 선배들한테도 물어봤다. 자기들끼리 다 해먹는다는 어떤 배제의 역사, 권력의 문제가 쌓이고 쌓여 폭발한 것이라고 짐작만 할 수 있을 뿐, 정확한 사실을 들을 수는 없었다. 우리도 분노해야 할 것 같고 분노하고 싶은데 누구도 우리에게 사실을 알려주지 않으니 그냥 웃다 말고, 비아냥거리다 말 수밖에 없었다.

미: 이 사건을 계기로 대안을 모색하기로 했다고 들었다. 어떻게 시작했고 어디쯤 와있는가?

홍: 이전부터 불만이 쌓여있었다. 논란 발생 후 겸사겸사 젊은 작가들, 기획자들, 기자들이 모였다. 그래서 얘기했던 것이, 그들이 했던 방식대로 그들을 치지는 말자는 거였다. 그건 꼰대 같으니까. 우리는 전혀 다른 지점에서 새로운 걸 해보자고 했다. 처음에는 좋은 사진상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작가들 지원제도를 고칠 수 있는가 함께 고민해봤다. 그런데 이것도 기존 시스템 안에서 헐떡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선은 우리끼리 사진을 존중하고 읽어보기로 했다. 사진은 물론이고 사진에 관한 글이나 사진과 관련된 공간에 관해 읽는 일부터 시작했다. 심사하고 줄 세우는 거 말고, 주기적으로 만나서 자랑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내기로 했다. 끝이 어디일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이 시대에 옆에서 작업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사람은 우리밖에 없다. 그리고 더 이상 식판 들고 줄 설 수는 없다.

 

지극히 사(회)적인 사진

 

미: 본인 사진 얘기를 해 보자. 2009년에 사진비평상 수상작도 그랬고, 2012년 <TAKE LEFT> 전시작도 저널리즘 사진에 가까웠다. 그런데 막상 개인전의 경우, 예컨대 2013년 <임시풍경>이나 2014년 <붉은, 초록>, 그리고 2015년 <마지막 밤(들)>에서는 저널리즘 사진과는 거리가 먼 스타일의 사진들을 전시했다. 어떤 이유가 있는가?

임시풍경 中 (2013)

임시풍경 中 (2013)

붉은, 초록 中 (2014)

붉은, 초록 中 (2014)

홍: 나에 대한 생각의 변화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저널리즘 사진을 보고 자랐고 그렇게 찍는 게 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널리즘 사진은 나랑 맞지 않았다. 나란 사람 자체가 주장 같은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 급박한 현장에 적응도 잘 못하고, 순간 포착 같은 것도 못한다. 그런 것에 큰 감흥을 느끼지도 못하고 해서, 대신 현장 주변을 맴돌며 천천히 찍는다.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일치해야겠더라. 멋들어진 사진은 못 찍는다. 내 정서에 맞지도 않는다. 그러다 보니 좀 더 솔직하게, 솔직하게 찍는다. 그렇게 해야 오래 간다. 남들 시선 의식하지 않고, 스트레스 안 받는다.
2013년 첫 개인전을 할 무렵 사진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면서, 내가 말하고 싶은 내용과 방식, 뉘앙스 같은 것들을 사진적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세상이 바뀌어야 돼”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이게 우리가 만든 세상이구나”라며 흔들리는 내 마음을 확인하는 정도? 세상에 악은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 악과 내가 상관이 없다는 얘기는 못하겠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주 나쁘게 살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마어마하게 나쁜 풍경을 담고 싶지는 않다. 숨겨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 정도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

미: 홍진훤의 사진은 무척 개인적인 풍경으로 보이는데, 그 앞에 서면 늘 사회적인 풍경과 마주치게 된다. 의도한 것인가?

홍: 내가 사회에 관심이 많아서 내 이야기를 해도 자연스럽게 사회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싶다. 내 삶이 사회와 분리되지 않는 이상, 내가 관심의 끈을 놓지 않는 이상,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사회적인 이야기는 계속 나온다고 생각한다. 현장에 줄기차게 나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런 식으로 내 이야기를 통해 사회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남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특별한 기사거리를 만들고자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작업이 철저하게 사회적으로 작동하기를 원한다.

마지막 밤(들) 中 (2015)

마지막 밤(들) 中 (2015)

 

‘지금여기’ no-where

 

미: 전통적인 저널리즘 사진이나 다큐멘터리 사진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른바 순수예술 사진도 아니다. 그 때문에 이곳에도 저곳에도 끼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보여주기 위해서 찍는 사진인데, 사진을 보여줄 매체 또는 공간이 없다면 큰 문제다. 이 공간 ‘지금여기’를 마련한 이유도 그 때문인가?

홍: 공동운영자인 사진가 김익현과 함께 나와 같은 처지의 사진가들을 위한 대안공간을 늘 고민해 왔다. 미술이나 영화의 경우엔 일찍부터 대안공간 실험들이 있었지만 사진에는 없지 않았나. 어디에서도 불러주지 않는 사진가들이 모일 만한 공간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러던 중 갤러리에 들를 일이 있어 어릴 적 살았던 이곳 창신동에 오게 됐다. 예전 거리가 그대로 있었다. 서울 중심지 한가운데에 아직 이런 곳이 남아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동네가 너무 매력적이어서 처음엔 작업실을 구하려고 부동산 중개소를 통해 이곳저곳 찾아다녔다. 그러다 재봉 공장이었던 이곳을 발견하고는 홀딱 빠져서 김익현을 불러 계약을 해버렸다.

창신동 골목에 자리한 ‘지금여기’

창신동 골목에 자리한 ‘지금여기’

미: ‘지금여기’의 영문명이 ‘no-where’이다. 그런데 《미래에서 온 편지》의 제목도 윌리엄 모리스의 《News from Nowhere》에서 따온 것이다. 공간의 이름은 어떻게 지은 건가?

홍: 심보선 시인의 <지금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처음엔 시대착오적이지 않나 생각했다. 우리는 타임라인 속에 살고 있으니까. 그런데 영문으로 쓰고 보니 ‘no-where’로도 읽히더라. ‘지금여기(now-here)’라는 선언이면서 동시에 ‘어디에도 존재하지 못하는(no-where)’ 지금 우리의 처지를 보여주는 이름이라 생각해서 선택했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인간이기 위하여
사랑이기 위하여
無에서 無로 가는 도중에 있다는
초라한 간이역에 아주 잠깐 머물기 위하여

 

<지금 여기> 심보선

 

미: 집값이 싼 동네라고 하지만 넓은 공간이라 운영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동안 ‘지금여기’에서 기획한 좌담이나 전시들이 대관료를 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들도 아니었고. 운영비용은 어떻게 감당하는가?

‘지금여기’의 내부

‘지금여기’의 내부

홍: 월세로만 매달 70만 원이 나간다. 두 사람이 빡세게 아르바이트를 해서 조달한다. 가지고 있는 명함이 세 종류다. 사진가, 공간운영자 외에 스튜디오 디렉터이기도 하다. 사진촬영, 영상촬영, 영상편집, 책편집, 인쇄디자인, 전시기획, 부스설치 등이 다 가능한 사업자다. 처음엔 홈페이지 만들고 사진 찍는 일 외엔 아무 것도 못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끔씩 물어본다. 혹시 영상편집 할 줄 아냐, 책편집 할 줄 아냐, 우리 전시하는데 부스 만들 줄 아냐고. 그러면 무조건 다 할 줄 안다고 한다. 그리고는 돌아와서 혼자 배워서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재벌이 되어버렸다. 직원은 나 혼잔데. 돈 벌려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요새 다 그렇지 않나.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나. 조선일보와 삼성 일만 아니라면 뭐든지 한다.

미: 개인적으로 하는 사진작업과 상업적인 작업 사이에서 갈등이 많을 듯하다. 개인적으로 하는 작업은 예술이고 돈을 받고 하는 일은 예술이 아니라는 사람들도 다수 있다. 때문에 이들에게는 상업예술이라는 말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본인은 어떤가?

홍: 예술의 상업화에 대한 걱정이면 모르겠는데, 금전적인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해야 예술이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고? 옛날에는 한정된 소수만이 예술을 소비했다면 지금은 불특정 소비자에게 직접 파는 것이 가능해졌다. 먼저 팔지 않을 때 오히려 가격이 높아진다. 예술이냐 아니냐는 돈을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다. 돈 받아서 그들이 만들어 달라는 대로 만들었는데 쓰레기가 나올 때도 있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때도 있다.

 

예술가의 연대

 

미: 예술은 돈과 무관해야 한다는 논리로 많은 예술가에게 무료봉사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른바 재능기부다. 본인도 재능기부 경험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홍: 재능기부는 애매하다. 어디에는 서로의 노동력을 나눠 쓰는 공간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연대의 기본이라 생각한다. 《빅이슈》가 창간될 때 매력적인 사업이라 생각해서 내가 먼저 찾아가 재능기부를 하겠다고 했다. 그 조직은 품앗이가 필요하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서울시나 일반 기업에 재능기부를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재능기부 하는 예술가는 개념 있는 예술가라는 식으로 권장할 게 아니다. 좋은 품앗이는 서로가 주체가 된다. 하지만 관이나 기업에서 권하는 재능기부는 결국 갑과 을의 관계로 진행된다. 이런 경우에는 서로 하면 안 된다.

미: 그렇다면 정치조직인 정당과의 연대는 어떤가? 지금 여기 예술가들을 위해 노동당이 해야 할 역할이 있다면 말해 달라.

홍: 예술가들은 어느 정당에 소속되기가 힘들다. 소속돼도 당적이나 갖고 있지. 하지만 세월호 관련 기획들에서 보듯이 프로젝트 중심으로는 얼마든지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자기 작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중적인 작가부터 전위적인 작가까지 진보적인 예술가들 정말 많지 않나. 이들이 모일 수 있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판을 만들어주는 일을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진보정당에서 할 수 있을 것 같다. 꼭 당 깃발 꽂을 필요 없지 않나? 노동당 문예위나 정의당 문예위가 유의미한 공동기획을 한다면 참여할 작가들 많다.

미: 좋은 판을 마련하고 초대하면 본인도 응하겠다는 말인가?

홍: 물론이다. 안 할 이유가 없다. 젊은 작가들이 안 하고 싶겠냐. 판만 깔아주면 다 알아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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