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포럼 사진4 - 서울시당 인조잔디공보물

학교운동장 인조잔디, 더 민주적으로 더 안전하게

[2015.05 제20호 정책포럼]

학교운동장 인조잔디, 더 민주적으로 더 안전하게

유해성 문제의 당사자가 구체적으로 알고 직접 결정할 권리

 

김한울|서울시당 사무처장

 

 

 

저 많은 인조잔디를 누가 다 깔았을까

 

운동장 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입학식이었다. 그야말로 삭막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황사를 품은 3월 초의 봄바람은 생각보다 거칠었고, 어디서 날려 왔는지 바람을 타고 굴러다니는 마른 풀들은 당장 찰스 브론슨이 숫자 열을 세며 권총을 차고 나와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어딜 가나 다를 바 없던 모래 운동장은 그날따라 유독 낯설었다. 그렇게 삭막하게만 느껴지던 모래 운동장이 시나브로 푸른빛을 띠기 시작한 건 불과 십 년 안팎의 일이다. 연중 뛰어다녀야 하는 운동장에 이를 도저히 견뎌낼 방도가 없는 잔디가 들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인조잔디’다.

학교운동장 인조잔디는 2005년부터 교육부와 국민체육진흥공단이 적극적으로 나서며 보급되기 시작했다. 경륜, 경정, 스포츠토토 등을 통해 조성된 국민체육진흥기금 지원에 지방자치단체 지원이 더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푸른 운동장이라니, 학교마다 두 팔 벌려 환영했음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월드컵 이후의 축구 열기를 잇는다는 명목까지 더해져 인조잔디 보급이 한창 탄력을 받던 때였지만, 안전성을 의심케 하는 일은 당시에도 있었다. 2006년에는 인조잔디 고무칩에서 발암물질이 검출됐고, 그 전 해인 2005년에는 이미 내구연한이 지난 야구장 인조잔디에서 유해먼지 발생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잔디 운동장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인조잔디 축구공원을 조성하던 공무원이 인조잔디 발암물질 검출에 관한 언론 인터뷰에서 ‘유해성 여부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인체에 해가 되지 않도록 조성하겠다’고 답해도 문제가 없었을 정도이니 더할 말이 없다(<서.유성구.대덕구에 국제규격 축구공원> 중도일보, 2006.12.19).

사고가 생겨야 대책을 마련하는 어리석음이 인조잔디 문제에서도 반복됐다. 2007년, 인조잔디가 설치된 지 두 달도 안된 초등학교에서 학생과 교사들이 두통과 피부병 증세를 호소하기 시작했다.(<교육부 ‘인조잔디 유해성’ 뒤늦게 실태조사> 한겨레, 2007.7.2). 2010년까지 1700억 원을 투입해 전국 1100여 개 학교에 인조잔디를 설치하기로 하고 한 달 남짓 지난 때의 일이다. 이후 속속 기준치 이상의 발암성 물질과 중금속이 검출되면서 인조잔디 유해성 논란에 불이 붙었다.

교육부는 재시공을 약속했지만 급작스런 예산 확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해 인조잔디 대부분이 방치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었고, 학교 교장조차 유해물질 검출 결과를 학교 구성원에게 알리지 못한 채 전전긍긍한다는 보도가 나오기에 이르렀다(<‘발암’ 인조잔디, 아직도 그대로…> 오마이뉴스, 2007.11.9).

구체적인 피해 발생에 따른 검사에서 기준치 이상의 발암물질과 중금속이 검출됐음에도 인조잔디 유해성 문제는 엉뚱하게 흘러갔다. ‘유해물질 없는 고급 인조잔디’나 유해물질 검출의 원인이 된 원료를 쓰지 않고 ‘인조잔디 자체를 수입’하면 문제가 없다는 식의 설명이 붙기 시작했다. 급기야 교육과학기술부는 국민체육진흥공단, 지자체와 함께 2009년부터 2012년까지 5000억 원을 추가로 들여 1000개 학교에 인조잔디 운동장을 확대하는 계획을 발표했다(<유해성 논란 인조잔디 운동장 또 확대> 내일신문, 2008.7.7). 여름철 햇빛으로 74도까지 과열되는 인조잔디로 인한 화상 우려까지 전해졌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뉴욕시, 무더위 속 ‘인조잔디 경고령’> 내일신문, 2008.7.16). 발암물질과 중금속이 계속 검출되는 와중에도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인조잔디 설치는 계속되었고, 신규 설치된 인조잔디에서는 다시 발암물질과 중금속이 검출되었다. 그리고 이 이해하기 힘든 악순환은 아직도 끊이지 않고 진행 중이다.

 

인조잔디, 그 후

 

경제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자. 인조잔디의 내구연한은 대개 7~8년 정도로 알려졌다. 2008년의 교육부 예산을 기준으로 보자면 인조잔디 설치비용은 학교 당 5억 원에 가깝다. 신규 설치이므로 내구연한이 끝날 때마다 들어가는 철거비는 포함되지 않은 금액이다. 예산은 복권사업의 수익금으로 조성된 국민체육진흥기금이 3억 5천만 원, 기초지방자치단체가 1억 5천만 원을 지원해서 총 5억 원의 비용을 충당하는 방식이다.

생활체육활성화 차원에서 운동장 일반 개방을 조건으로 이루어지는 사업이라고는 하지만, 인조잔디 설치에 소요되는 비용과 각급 학교에서 교육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소요되는 비용을 견주어보면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모양새다. 하물며 인조잔디의 안전성조차 검증되지 않은 상황에서 생활체육활성화를 위한다니, 보다 많은 시민들이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인조잔디를 밟으며 건강한 삶을 누리기 바라는 것 자체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문제는 이미 발생 중이다. 유해물질이 포함되었음을 뻔히 알면서도, 비용이 없어 철거를 미룬 채 운동장 사용을 중지하는 학교까지 나타났다. 도봉구의 방학초등학교는 유해물질 검출로 사용 중단된 운동장의 인조잔디를 걷어내고 새로운 인조잔디를 설치하기 위한 예산을 서울시 참여예산사업으로 제안해서 2014년에 지원을 받기도 했다. 어찌어찌하여 방도를 찾은 셈이지만 일반적인 해법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저 무수한 유해 인조잔디를 철거할 비용을 어떻게 마련할 테고, 새로 설치될 인조잔디의 안전성은 어떻게 확보할지를 따져 물어야 하는 이유다.

인조잔디로 인해 학생과 교사가 두통과 피부병을 겪어야 했던 2007년으로부터 8년이 지났다. 그렇다면 그 사이, 인조잔디의 유해성 문제가 해결됐을까.

정책포럼 사진1 - 인조잔디 유해성 점검 결과 표

인조잔디 유해성 점검 결과 (*21개교 중복)

2014년 세밑에 문화체육관광부가 내놓은 보도자료에 의하면, 2010년 이전에 인조잔디를 설치한 1037개 학교를 전수조사한 결과 기준치를 초과한 납이 검출된 학교가 13%에 육박한다. 카드뮴, 6가 크롬, 발암물질로 알려진 PAHs가 기준치를 초과하여 검출된 경우까지 포함하면 5개 학교 중 1개 학교가 기준치를 넘는 유해물질이 확인된 안전하지 않은 인조잔디를 여전히 끌어안고 있는 셈이다. 전수조사 기준이 2010년 이전 설치 학교로 제한된 이유는 그나마 2010년에서야 인조잔디 유해물질 기준치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정책포럼 사진2 - 서울시내 학교 운동장 인조잔디 연도별 설치 건수 그래프

정책포럼 사진3 - 서울시내 학교 운동장 인조잔디 연도별 설치 건수 표

서울시내 학교 운동장 인조잔디 연도별 설치 건 수

2010년 이전에 설치된 학교 운동장 인조잔디의 내구연한이 도래 중이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한 여름 타는 듯한 햇볕에 달아오른 인조잔디는 직접 피부에 닿으면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겁다. 반복적인 수축과 팽창에 더하여 끊임없이 물리적 충격을 받아야 하는 운동장 인조잔디의 특성을 생각하면, 내구연한이 다가올수록 급격하게 노후화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다. 연한이 다가올수록 갈라지고 찢어지며 깊숙한 곳에 있던 유해물질이 잔디 위의 사람에게 노출되는 빈도나 양 또한 함께 증가하리란 건 불 보듯 뻔하다.

기준치 또한 의심스럽다. 현행 납 검출 기준치는 공산품 기준을 빌려온 것이다. 노후화로 인해 더 많은 유해먼지가 날리는 상황에 대한 고려가 충분히 반영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공산품 기준의 유해물질 기준치를 호흡 등을 통해 인체에 유입이 가능한 인조잔디의 기준치로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사용자가 만져도 안전한 기준 수치와 인체에 유입되어도 안전한 기준 수치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인조잔디의 유해성 여부에 대한 논쟁은 국외에서도 현재진행형이다. 극소량의 납조차도 어린이의 신경인지 발달에 유해할 염려가 있으므로 어떠한 경우도 납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는 견해를 주목해 볼 만하다. 이에 따르면 기준치 자체가 무의미하다. 납은 어느 기준치 이하가 안전한 게 아니라 전혀 검출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당사자 결정권과 알 권리에서 시작하는 유해성 정보 통제권

 

유해물질 검사 방법과 기준치의 신뢰성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문제는 유해물질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하고 안전성을 확보할 기준이 과학적인 근거에 따라 충분히 신뢰할 만한 수준으로 형성되기 이전까지 이 문제를 어떠한 기준으로 다루어야 할 것인가다.

지금까지 인조잔디가 설치되는 과정에서 학교 구성원이 인조잔디에 포함된 유해물질의 유해성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고 그에 따라 인조잔디 설치에 관한 판단을 스스로 내릴 수 있는 절차나 제도는 없었다. 지금까지 학교운동장 인조잔디가 5억 원의 설치 지원금일 뿐, 결코 중금속과 발암물질을 포함한 위험물로 고려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인조잔디를 직접 사용하는 학생과 시민을 비롯하여, 교사와 학부모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그 유해성 여부와 기준에 대한 설명을 듣지 못한 채 그저 푸른 운동장으로만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누구나 자신의 건강과 직결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고 그에 따라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당장 우리 동네 학교에 설치된 인조잔디가 과연 안전하다고 할 만한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근거를 요구하고 제공받는 일은 가장 기본적인 권리 중 하나인 알 권리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에 근거하여 인조잔디를 택할지, 아니면 다른 방안을 채택할지를 학교 구성원들이 직접 결정하고 책임지는 당사자 결정권은 당연하지만 보장받지 못했던 자연스러운 권리다. 학교운동장 인조잔디의 문제는 바로 이 기준에서 출발해야 한다.

충분히 안전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의 마련은 전문가들의 몫이다. 그러나 당장의 판단을 위해 지금까지 밝혀진 내용을 확인하고 판단할 권리는 인조잔디를 이용하는 누구에게나 있다. 더불어 이 권리의 맥락을 확장하자면, 우리는 우리 삶의 안전에 조건을 이루는 요소들에 대해 충분히 알 권리를 가지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또 다른 측면의 기본권을 강조하는 의미가 된다.

단순히 인조잔디가 안전한가 여부에 갇히지 않고 더 넓은 권리의 영역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안전을 둘러싼 문제에 대한 충분한 자기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시작 중 하나가 바로 학교운동장 인조잔디에 관한 문제가 되기를 제안한다. 좀 더 민주적으로, 좀 더 안전하게.

 

정책포럼 사진4 - 서울시당 인조잔디공보물

서울시당에서 제작한 인조잔디 공보물

 

노동당 서울시당은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2013년 서울시교육청이 실시한 2010년 이전 가설된 인조잔디에 대한 전수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학교인조잔디 중금속 검출 지도>를 제작하고(http://goo.gl/EmQj23), 지역 당원들과 함께 해당 학교 앞 캠페인을 전개하고 관련기관과 연계해 학부모 강좌와 인조잔디 중금속 검사 등을 진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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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집 아저씨도, 치킨집 사장님도 전 국민 산재보험으로

[2015.03 제18호 정책포럼]

슈퍼집 아저씨도, 치킨집 사장님도 전 국민 산재보험으로

 

홍원표|정책실장

 

 

 

같은 사고, 다른 보장

 

업무 중이던 노동자가 교통사고로 재해를 입으면 어떤 보상을 받을 수 있을까? 이 경우 산재보험과 자동차 보험 모두로부터 보상을 받을 수 있다. 다만, 같은 내용으로 중복 보장을 받을 수는 없다. 두 보험 모두 보상을 받으려고 할 경우, 한 보험의 혜택 외에 추가적 혜택 부분에 대해서만 다른 보험에 청구할 수 있다. 두 보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산재보험은 노동자의 과실유무와 관계없이 산재보험혜택을 모두 받을 수 있으나(무과실책임주의), 자동차보험은 본인의 과실유무에 따라 보상금액이 달라질 수 있다(과실책임주의).

그렇다면, 대리운전 중이던 노동자가 교통사고를 당하면 어떻게 될까? 굉장히 복잡해진다. 우선 대리운전 노동자의 법적 노동자성을 따져 산재보험 보장 여부를 판단하게 된다. 대리운전 노동자는 이른바 특수고용노동자로 사실상 노동자지만 법적으로는 자영업자 신분으로 위장 채용되어 산재보험 당연 가입 대상자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산재를 적용받기 위해서는 소송 등을 통해 노동자성을 인정받은 후에야 가능하다. 자동차 보험은 노동자가 가입한 자동차 보험의 종류에 따라 보장범위가 달라진다.

마지막으로 동네 슈퍼집 아저씨가 배달 중 교통사고를 당한다면? 산재보험이 불가능하다. 특수고용노동자와 달리 노동자성을 다툴 여지조차 없는 사업주(자영업자)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개인이 가입한 자동차 보험 또는 상해보험의 종류에 따라 보장을 받게 된다.

그렇다면 배달을 같이 나간 사장님이 다쳤을 경우에는 산재보험이 가능할까? 슈퍼집 아저씨와는 달리 노동자와 함께 배달 나간 사장님은 가능하다. 현행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하 산재보험법)은 산재보험 대상 사업의 사업주 역시 보험가입자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를 보통 당연가입사업주라고 한다.

 

산재 보험은 보편 복지?

 

위에서 예를 든 네 경우 모두 다 ‘일하다’ 다친 경우지만, 경우에 따라 공적 보험의 혜택을 받거나 못 받는다. 공적 보험이 고용 상 지위에 따라 적용 범위를 달리 하기 때문이다.

2013년 기준으로 산재보험 적용률을 살펴보면, 산재보험 적용 노동자(보험 가입자)는 1,544만 명으로 임금노동자 대비 83.9%의 적용률을 보여주고 있으나, 전체 취업자를 기준으로 할 경우에는 61.9%에 불과하다. 일하다 다쳐도 10명 중 4명은 고용 상 지위 때문에 산재보험 보장을 못 받는다는 말이다.

 

취업자(A) 임금 노동자(B) 비임금 노동자 산재보험 적용 노동자(C) 적용률 1(C/A) 적용률 2(C/B)
24,962 18,414 6,548 15,449 61.9% 83.9%

 

이처럼 모든 사람이 산재 보험 적용을 받지 못 하는 이유는 현행 산재보험법이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노동자 중 일부에 대해서는 적용을 제외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재보험법 제6조는 법의 적용 대상을 ‘근로자를 사용하는 모든 사업 또는 사업장’으로 규정하고 있어 우선 자영업자 및 무급가족종사자 등 비 임금노동자를 원천 배제하고 있다. 또한 적용 예외 규정에 따라 공무원/군인/교사, 선원, 소규모 건설업 노동자, 가구 내 고용활동 종사자, 상시노동자 수가 1명 미만인 사업장 노동자, 농업/임업/어업/수렵업 중 법인이 아닌 자의 사업으로서 상시노동자 수가 5명 미만인 사업장의 노동자 등을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적용 제외 대상 중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업종은 자영업자다. 2013년 기준 547만 명에 달한다. 적용 제외 임금노동자는 300만 명에 육박하는데, 이 중 공무원/군인/교사/선원 등 별도 법률에 의한 재해보장이 가능한 업종이 60%를 차지하고, 나머지 40%는 규모가 작거나 상시적 노사관계 파악이 쉽지 않은 사업장으로 (아마도) 행정적 이유로 제외된 사업장이다.

대다수의 사회보장은 근대적 노동시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고 산재보험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산재보험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여러 가지 사회보장 중 가장 먼저 공적 보험으로 자리 잡아 여타 다른 사회보장의 발전을 이끄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초기 산재보험은 지금과는 달리 사용주의 불법행위에 따른 재해 보상의 성격이 강했다. 즉 사용자의 과실이 인정될 경우(사용자의 불법행위로 인한 재해) 재판을 통해 보상을 청구하는 과실책임주의 방식이었다. 이후 산재보험은 이러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노동자에게 신속하고 확실한 보장을 위해 무과실책임주의로 전환되어 왔다. 산재보험의 특성과 산재보험의 발달 역사는 공적 보험으로서의 산재보험 주 대상자가 노동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 준다.

하지만 이 같은 근대적 사회보장 제도는 산업의 발달과 이에 따른 다양한 고용형태의 출현, 그리고 신자유주의 공세로 인한 비정형 노동자의 확대 등으로 인해 그 공적 기능이 한계에 다다랐다. 한국 산재보험법의 경우 무려 6개의 특례 조항을 갖고 있는데, 이 역시 산업 발달에 따른 다양한 고용형태의 출현과 신자유주의에 의한 비정규 고용형태 확대와 무관하지 않다. 산재보험법 상 적용대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특례 조항을 통해 적용하는 대상은 국외 사업 노동자, 해외 파견자, 현장 실습생, 중소기업 사업주, 특수고용 노동자 중 일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 중 자활 참여자 등이다. 이 중 국외 사업 노동자와 해외 파견자의 경우 국가 단위 사회보장 제도의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고, 나머지 4개의 특례 조항은 모두 노동자처럼 일하되 법적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 하는 노동자의 문제다.

 

사회보험 적용 기준으로서의 노동자성?

 

우리가 통상 노동관계법이라고 부르는 법은 세 가지 범주로 나눠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개별적 노사관계를 규율하는 법체계이고, 두 번째는 집단적 노사관계를 규율하는 법체계, 마지막으로 노동시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회보장을 위한 관련 법규들이다. 한국의 경우 개별적 노사관계의 대표적 법률은 근로기준법, 최저임금법 등이고, 집단적 노사관계를 규율하는 법률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이 있으며, 사회보장과 관련해서는 고용보험법 및 산재보험법, 그리고 고용 상 지위를 근거로 적용하는 사회보장법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노동자라 함은 사회적으로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지만, 법적 권리를 보장하는 노동법에서의 노동자는 이보다 엄밀한 정의를 갖고 법의 목적에 따라 그 개념 정의도 차이가 난다. 개별적 노사관계는 임금, 노동시간, 휴일, 휴게시간, 해고 등의 문제를 다루며 노사관계 성립과 동시에 노동자와 사용자의 권리와 의무가 자동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가장 엄밀하게 노동자성을 따진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이나 휴일 보장은 사용자가 법에 보장한 수준 이상을 보장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거나 의무 이행의 책임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를 적용할 노동자성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따지게 된다.

 

사진: 근로복지공단 홈페이지

사진: 근로복지공단 홈페이지

 

반면 집단적 노사관계를 법으로 규율하는 이유는 노사 간의 대화와 협력, 갈등 조정 등 당사자들의 자율적 조정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개별적 노사관계처럼 엄격한 노동자성과 사용자성을 따질 이유가 없다. 개별적 노사관계에서는 노동자와 사용자가 사용종속관계에 놓여 있는가 아닌가가 매우 핵심적인데 반해, 노조법 상 사용자와 노동자는 반드시 직접적 사용종속관계일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산별이나 지역 사용자단체의 경우 산별 또는 지역 노동자에 대한 임금 지급, 휴일 보장 등 근로기준법 상의 직접적 사용자 책임을 갖지는 않지만, 성실 교섭 의무 등 노조법 상 사용자의 책임을 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회보장의 경우 적용 대상을 한정하고 비용 부담 주체를 명확히 하기 위해 노동자성과 사용자성을 따지는 것이기에 개별적 노사관계나 집단적 노사관계에서 만큼 노동자성의 구분이 본질적이지 않다. 또한 사회보장이 보편적일수록 그 적용 대상을 한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노동자성의 의미가 축소된다. 국민연금이나 건강보험처럼 제도 도입 초기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하다 대상이 확대되는 경우, 노동자성 여부는 비용 부담 주체 문제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큰 의미를 갖지 않게 된다.

 

국제 기준은 산재 적용 범위 확대

 

앞서 살펴보았던 산재보험법 특례 조항은 산재보험 도입 이후 제도적 확대를 극히 제한적으로 허용한 경우다. 해외의 경우에는 초기 도입 시 피고용자, 즉 임금노동자만을 위한 제도로 도입되었으나, 점차 적용범위가 넓어져 왔다. 가장 일차적인 확대 대상은 농민과 자영업자였으며, 가정주부와 학생은 물론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까지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2002년 발간한 <산재보험제도의 국제비교 연구>에 따르면, OECD 30개국 중 전국민을 대상으로 산재보험을 시행하는 국가는 네덜란드와 뉴질랜드가 있고, 취업자뿐만 아니라 가정주부, 학생 등 미취업자도 일부 적용범위로 포괄하는 국가로는 독일, 룩셈부르크, 오스트리아, 헝가리, 노르웨이, 덴마크 등이 있으며, 자영업자까지 적용대상으로 하고 있는 국가가 23개국, 피고용인만을 대상으로 한 국가는 7개국으로 나타났다. 피고용인뿐만 아니라 자영업자까지도 대상으로 한 23개국 중에서 자영업자 전체를 대상으로 한 국가가 14개국, 자영업자 중 일부만을 대상으로 한 국가가 9개국으로 나타났다.

 

슈퍼집 아저씨도, 치킨집 사장님도 전 국민 산재보험으로

 

최근에는 투쟁이 다소 소강(?) 상태이긴 하지만, 한 때 특수고용노동자 문제의 해법으로 산재보험 노동자성 확대가 주요 요구 사항으로 등장한 바 있다. 이는 실질적으로 산재 적용을 통해 특고노동자의 노동조건을 향상시키자는 의미도 있었지만, 근로기준법이나 노조법보다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사회보장법 상의 노동자성 인정을 얻어내겠다는 의도 역시 담겨 있다.

익히 알고 있다시피 특수고용노동자는 사용자가 노동자를 자영업자 신분으로 위장하여 근로계약이 아닌 도급 형태로 계약을 맺음으로서 사용자 책임을 회피하고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박탈한 경우다.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 함으로써 근로기준법과 노조법의 기본 권리는 물론 각종 사회보장제도에서도 소외당해 그 고통이 두 배 세 배에 달할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 산재보험 상 노동자성을 확보하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산재보험의 주요 대상이 피고용 노동자이며, 그 외 계층은 예외적 적용으로 한정된다는 기본 골간을 그대로 유지한 채, 산재보험의 노동자성을 확대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노동당은 2012년 총선부터 산재보험 개혁을 위해 노동자성 정의 확대를 넘어 자영업자를 포함한 경제활동 인구의 산재보험 의무가입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슈퍼집 아저씨도, 치킨집 사장님도, 그 누구라도 일하다 다치면 고용형태와 상관없이 치료와 재활, 그리고 생계를 보장받아야 한다.

불법파견과 위장도급 등 간접고용 문제 해결을 위해 노동계와 진보진영의 정당 및 단체들은 ‘진짜사장 나와라 운동본부(운동본부)’를 출범하기도 했다. (사진 : 참세상)

비정규직 더 하라는 박근혜 정부

[2015.02 제17호 정책포럼]

비정규직 더 하라는 박근혜 정부

 

홍원표정책실장

 

 

 

비겁한 설문

 

장그래 입사 동기들에게 물었다. “장그래가 곧 계약 만룐데, 계약기간을 한 번 더 연장하고 그 계약기간이 다 끝날 때 수당을 좀 챙겨주면 어떨까?” 그 친구들은 생각했다. ‘곧 잘릴 텐데… 기간이라도 좀 연장하면 낫지 않을까? 어차피 정규직이 어려울 거면 잘릴 때 수당이라도 좀 더 챙겨 가게 도와줘야겠다.’

안타깝지만, 회사의 룰에 대해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신입사원인 그네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 게다. 인지상정일 수 있다. 하지만 사규를 개정하겠다고 나선 힘 센 전무님께서 이런 설문조사를 근거로 ‘봐라 장그래 친구들도 찬성한다. 이게 좋은 거다’라 하면, 인지상정을 이용한 사기고 폭력이다. 정규직 전환이 싫다고 하면 욕먹을까 싶어 에둘러 신입사원 핑계 대는 비겁한 일이다. 그런데 이 비겁한 에피소드는, 안타깝게도 픽션이 아니다.

지난 해 12월 29일 고용노동부가 노사정위에 <비정규직 처우개선 및 노동시장 활력제고 방안>을 제출했다. 정부가 제출한 이 비정규직 처우개선 안에는 비정규직 사용기한을 현행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자는 안이 담겨 있다.

비정규직 사용기한 연장은 기간제법 시행 전후부터 재계가 끊임없이 주장해 왔던 일이다. 보수 정부 역시 호시탐탐 개악을 시도해 왔다. 가장 최근에는 이명박 정부가 기간제법 시행 이후 2년이 되면 100만 실업자가 생길 것이라 주장하며 기간 연장을 시도한 바 있다. 여론의 저항이 심해 관철시키지 못 했다. 물론 실업대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의 조사에 따르면, 1년 6개월 이상 기간제 노동자 중 계약기간 종료를 앞 둔 노동자는 월 평균 1만 명이 안 된다. 처음부터 100만 실업대란은 일어날 리 만무한 일이었다. 정부가 국민을 겁박해 자본에게 이익을 안겨주려 거짓말을 했을 뿐이다.

박근혜 정부도 불과 몇 년 전 폐기된 이 안을 다시 들고 나왔다. 이명박 정부 때의 반대 여론이 부담됐는지, 비정규직도 원한다는 설문 결과를 슬쩍 들고 나왔다. 실제로 비정규직 당사자를 대상으로 한 이 설문조사에서 박근혜 정부 안에 찬성하는 비율은 82%에 달했다.

비정규직 노동자 82%가 찬성했다는 고용노동부의 설문 문항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기간제 근로자를 2년 근무한 후 회사와 합의하면 계약기간을 연장하고, 그 이후 사업주가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않고 계약을 종료하면 근로자에게 금전으로 일정액을 보상하도록 하는 방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해 아직 미개한 시절에, 그러니까 박정희나 전두환 시절에 학교를 다녔던 아저씨 세대는 이런 유의 질문을 잘 기억하고 있다. ‘3대 맞고 2대 더 맞을래, 3대 맞고 5대 더 맞을래?’ 안 맞겠다고 답하면 수도 없이 맞게 되니 3대 맞고 2대 더 맞는 걸 택한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간사를 맡고 있는 새누리당 권성동 의원은 이 설문조사 결과를 갖고 이렇게 주장했다. ‘2년은 너무 짧다, 기간을 연장해 달라는 것이 비정규직의 의견이다.’ ‘학생들이 자기 잘못을 크게 뉘우친 나머지 3대만 맞지 않고 2대 더 맞겠다고 했다’고 기록한 폭력 교사의 생활기록부를 보는 느낌이다.

 

마음은 무겁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 사회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비정규직 비중은 전체 노동자의 절반 수준으로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다. 비정규직은 가장 많지만, 그 비정규직들의 정규직 전환 비율은 또 가장 낮다. 지난 해 OECD가 발표한 <2013년 비정규직 이동성 국가 비교>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비정규직 10명 중 1~2명만이 수년 뒤 정규직으로 일하고 나머지 8~9명은 여전히 비정규직이거나 실직 상태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16개 조사 대상 국가 중 가장 열악한 수준이다.

높은 비정규직 비율은 고용불안과 직결된다. 고용불안 정도를 측정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지표는 근속연수와 단기근속자 비중이다. 한국 노동자의 평균 근속연수는 5년 남짓이고 비정규직은 2년이 채 못 된다. 여성 비정규직의 경우는 1년 남짓이다. 최근 몇 년간 OECD 회원국의 평균 근속연수는 10년 내외를 기록해 왔고, 한국 다음으로 짧은 나라인 미국이나 아이슬란드의 경우는 7년 내외다. 단기근속자 비중 역시 가장 높다. 2014년 한국은행이 발표한 <고용보호제도가 노동시장 이원화 및 노동 생산성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는 전체 노동자 중 1년 미만 근속 노동자의 비중이 한국 38%로 OECD 평균 18.6%의 2배가 넘는다고 보고했다.

고용만 불안한 게 아니다. 임금격차 역시 심각하다.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2013년 정규직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298만 원인 반면, 비정규직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140만 원으로 2배 차이가 난다. 여성 비정규직의 경우에는 120만 원도 되지 않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박근혜 대통령조차 “비정규직을 생각하면 참 마음이 무거워진다(대통령 신년 기자회견 질의응답).” 하지만 마음이 아픈 건 아픈 거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왜냐하면 박근혜 정부에게 비정규직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당연히 있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는 <비정규직 처우개선 및 노동시장 활력제고 방안>의 기본 방향을 설명하면서, 비정규직 확대는 ‘선진국에서도 보편적인 현상’으로 ‘취업애로계층의 노동시장 진입 촉진’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측면도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박근혜 정부에게 비정규직은 ‘마음은 무겁지만’ 그냥 ‘있어야 하는 일’이다. 그렇다 보니 2년짜리 비정규직을 4년짜리로 만들어 주는 게 그나마 마음의 부담을 더는 일이 되는 거다. 아이들 가르치다 보면 훈육도 필요하고 사랑의 매도 필요하고, 선진국도 아마 때릴 테니, 마음은 무겁지만, 3대 때리고 2대만 더 때리는 방법을 택하자는 것이다.

 

사용사유 제한과 간접고용 규제가 핵심

 

물론 박근혜 정부의 말처럼 비정규직 사용이 불가피한 경우가 있다. 임신 출산으로 결원이 생겨 한시적으로 대체할 인력이 필요하다든지 스키장이나 수영장처럼 계절적 요인으로 지속 고용이 불가능한 경우 등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 될 리는 없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이렇게까지 늘어난 이유는 기업이 임금을 더 적게 주고, 아무 때나 맘대로 해고하고, 법이 정한 사용자 책임을 회피하려 비정규직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부가 이를 방치하거나 나서서 조장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부가 조장하고 자본이 남용해서 발생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해법은 이미 많이 제출되었다. 해법의 첫 번째 핵심은 정말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정규직 채용을 원칙으로 하라는 것이다. 이른바 사용사유 제한이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두 번째 핵심은 간접 고용 규제다. 자본은 끊임없이 제도의 사각지대를 이용해 비정규직을 사용하려는 유인을 갖는다. 기간제 중심의 비정규직법이 도입된 이후 도급과 파견의 구분이 애매한 맹점을 이용한 간접고용 비정규직 사용이 증가가 대표적 사례다. 간접고용 비정규직 증가는 2000년 중반 이후 한국 사회 노사관계에서 가장 격렬하고 가장 잦은 분쟁을 낳았다. KTX 여승무원 문제, 동희오토 간접고용, 현대자동차 불법파견 문제, 삼성전자서비스 노사 분쟁, 씨앤앰, 브로드밴드, 유플러스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개별 자본에게 당장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사회적으로는 큰 대가를 치러야 했고 수십만 명의 노동자가 고통 받았다.

이처럼 한국 사회가 가장 열악하고 노사분쟁도 심각한 비정규직 형태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간접고용에 대한 대안은 아직 논의조차 제대로 하지 못 했다. 노동계와 진보진영은 간접고용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직접고용 원칙을 적용하고, 도급·파견 구분 기준을 명확히 해 도급을 가장한 불법파견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해 왔다.

 

불법파견과 위장도급 등 간접고용 문제 해결을 위해 노동계와 진보진영의 정당 및 단체들은 ‘진짜사장 나와라 운동본부(운동본부)’를 출범하기도 했다. (사진 : 참세상)

불법파견과 위장도급 등 간접고용 문제 해결을 위해 노동계와 진보진영의 정당 및 단체들은 ‘진짜사장 나와라 운동본부(운동본부)’를 출범하기도 했다. (사진 : 참세상)

 

국제적 기준 역시 이러한 원칙을 강조한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진정한 사용자가 누구인지, 노동자에게 주어진 권리가 무엇인지, 이를 보장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판명하는 것이 주요한 관건’이라고 말한다. 또한 국제표준화기구(ISO)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기준을 수립한 ‘ISO 26000’을 통해 ‘법적으로 고용관계로 인정되는 관계를 위장하여 고용주에게 법으로 부과되는 의무를 회피하려고 해서는 안 되며’, ‘조직의 파트너, 공급업체 또는 하청업체의 불공정, 착취 또는 악용되는 노동관행으로 혜택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한국의 국가인권위원회도 2009년 <사내하도급 근로자 노동인권 개선을 위한 법령 및 정책 개선 권고>를 통해 노동부 장관에게 ① 현행 노동관계법상의 사용자 정의규정을 근로계약 체결의 당사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근로조건 등의 결정에 대하여 실질적인 영향력이 있는 자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개정할 것, ② 상시적인 업무에 대한 직접고용원칙을 법률에 명시적으로 규정함으로써 간접고용의 남용을 억제할 것, ③사내하도급근로자에 대한 차별금지 및 이들의 차별시정 신청권을 법률로 명문화 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세 번째는 노사관계의 정비다. 비정규직 남용으로 발생하는 문제를 당사자들이 실질적 권한을 지닌 사용자, 즉 진짜 사장과 대화와 교섭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사용자와 노동자의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

마지막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적용이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비단 비정규직 문제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성별이나 학력, 인종, 성적 취향, 고용형태 등 다양한 이유로 차별적 처우를 목격하고 있다.

 

정치가 중요하다

 

최근 법원에서 주목할 만한 판결이 나왔다. 지난 1월 6일 서울동부지법은 한국고속도로 요금징수 노동자 529명이 낸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에서 ‘도로공사와 근로자들이 소속된 외주 운영자들 사이에 체결된 용역계약은 실질적으로 근로자 파견 계약에 해당한다’며 한국도로공사가 불법파견을 사용한 것이라 판단했다.

공기업인 도로공사가 도급을 위장한 불법파견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번 판결은 소송을 제기한 529명에만 해당하는 것이지만, 한국도로공사가 관리하는 전국 톨게이트 334곳에서 용역회사 소속으로 일하는 노동자가 7200여 명에 달한다는 점에서 향후 공방이 더욱 확대될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이번 판결에서 불법파견으로 판단된 529명 노동자가 모두 똑같은 권리를 보장받지 못 했다는 점이다. 202명은 한국도로공사에 직접 고용된 노동자로서의 지위를 갖는 반면, 327명에 대해서는 도로공사가 직접 고용할 의무를 갖게 되었다. 즉 사용주가 의무를 이행해야만 비로소 직접 고용된 노동자의 지위를 보장받게 된다.

이는 2007년 개악된 파견법 때문이다. 당시 비정규직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비정규직법 개정을 주도한 열린우리당은 불법파견 사용 기업의 책임을 오히려 경감시키는 방향으로 개악했다. 그 결과 2007년 이후 입사자들은 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의무 이행을 기다려야만 한다. 정치의 실패가 불법파견으로 고통 받는 노동자에게 두 번의 고통을 안긴 셈이다. 진보정치가 성장하고 노동당이 존재해야 할 이유다.

주민발의로 방사능 급식 조례를 제정한 서울 구로 (사진: 구로당협)

2015년, 정치를 기획하자

[2015.01 제16호 정책포럼]

2015년, 정치를 기획하자

 

홍원표|정책실장

 

 

 

2015년은 노동당에게 매우 중요한 한해가 될 것이다. 올해 노동당은 새로운 대표단과 의결기구를 구성하게 된다. 2015년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따라 2016년부터 3년 연속 치러지는 전국선거(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에 대응하는 당의 체력이 결정될 것이다. 새로 구성되는 대표단에 따라 2015년 이후 당의 진로가 결정되겠지만, 어떤 대표단을 구성해도 노동당이 2015년을 우선적으로 실천해야 할 일 중 하나는 ‘정치’를 기획하는 일이다.

정당이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마나한 당연한 말이다. 당연한 일을 굳이 지면을 통해 환기시키는 이유는 그만큼 당의 현실이 어렵기 때문이다. 2013년 전국위원회를 통해 노동당이 결정한 핵심 사업은 재창당, 지방선거 준비, 그리고 9대 핵심 사업이었다. 9대 핵심 사업의 내용은 기관지 창간, 당원교육 강화, 홍보․미디어 사업, 당원배가 운동, 당 재정 확대 사업, 지역정책연구소 설립사업, 중앙연수원 설립 준비, 당 의원단 활동 및 지원 강화, 민생경제활동 등이다. 재창당 사업도 그렇고 주요 사업들 대부분 조직 정비․강화 사업이었다.

2014년의 경우 상반기 사업은 지방선거 준비로 대체되었다. 2014년 하반기 사업은 조직사업, 정치투쟁, 의정지원 사업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여전히 정책당대회 등 당 조직 정비․강화 사업이 주된 내용이며, 정치투쟁 사업의 정치개혁 투쟁을 제외하고는 주어진 의제에 충실히 대응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조직 역량의 70%는 조직 유지에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라고는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당의 주요 사업은 지나치게 당 조직 정비․강화 사업에 치중돼 왔다. 2011년 독자통합 논의 이후 당 주요 정치인 및 활동가들의 집단 탈당, 2012년 대선 방침을 둘러싼 당내 갈등 등 당은 수년간 역량 유실과 끊임없는 이완으로 침체돼 왔기 때문에 조직 정비․강화를 위한 노력을 불가피했고,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운동선수의 역량이 식단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당의 역량 역시 조직 사업만으로 복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은 정치를 위한 조직이고, 대중들에게 비전을 제시해야 할 책임을 갖는다. 따라서 선거라는 정해진 정치 일정이 없는 2015년, 노동당이 무엇보다 주력해야 하는 것은 ‘정치를 기획’하는 일이다.

이 글은 이러한 취지에서 지역과 중앙 차원에서 2015년에 집중했으면 하는 몇 가지 사업을 제안하는 것이 목적이다. 아래에서 제시한 안들은 일종의 예시다. 하지만, 단순한 예시가 아니라 당에서 이미 수행한 경험이 있거나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지만, 집중적으로 실천에 옮기지 못 한 것들이다. 또는 지난 정책당대회에 당원들이 참여하고 제안한 정책 사업 중 2015년 정세와 부합할 것이라고 판단되는 것들이다. 구체적 제안을 나열하는 것은 중앙당을 비롯해 각 당부가 2015년 사업계획을 수립하면서 참조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2015년 지역 정치 사업을 위한 몇 가지 제안

 

흔히들 지방자치가 여전히 정치보다는 행정의 영역으로 인식될 정도로 발전하지 못했다고 평가해 왔다. 하지만,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무상급식을 둘러싸고 의회와 대립하다 실패해 중도 사퇴했고,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진주의료원을 없애기 위해 의회 날치기를 강행했어야 했다. 오세훈 시장과 서울시의회의 대립은 광역의회 내 정치의 위상이 강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경남도의회의 날치기는 역설적으로 의회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해졌음을 방증하는 일이다. 지역 정치는 더욱 활성화되고 있지만, 정작 지역을 강조했던 진보정치는 그만큼 지역 정치에 크게 집중해 오지 않았다.

노동당은 지난 지방선거에서 몇 가지 중요한, 하지만 소수정당이어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지역 정책들을 제시한 바 있다. 또한 몇몇 지역에서는 의원 하나 없이 지역운동을 묶어내 조례를 제정하거나 지역에서 의미있는 대안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2015년에는 이러한 정책 사업들을 당 조직 전체 사업으로 확장하고, 없는 자원에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 제안했었던 지역 정책을 효율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버스공영제 운동>

 

대중교통은 계급과 환경, 그리고 지역경제와 복지 문제가 얽힌 의제다. 대중교통은 자가용-도로 중심의 교통체계와 대립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에너지 문제와 직결된다. 대중교통은 주 이용자가 노동자 서민이라는 점에서 계급적 이슈다. 교통 약자 이동권 보장은 대중교통의 ‘보편성’을 재정립하고 확대할 것을 요구한다. 교통망 설계에 따른 지역 간 교류의 변화는 지역경제를 순환적 또는 위계적으로 만드는데 영향을 미친다. 기존의 자가용-도로 중심의 교통체계에서 벗어나 대중교통, 나아가 무상교통을 통한 ‘이동의 자유’를 보장할 때 이는 다양한 사회적 권리를 강화하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지역의 작은 변화로 큰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운동이다.

지역의 버스운영체계에 대한 모니터링, 공영제 전환 여론 형성, 지역 사정에 맞는 교통체계 개편안 등을 마련하고 나아가 지역 공영버스 운영을 위한 조례 제정 및 예산 확보까지 이어지는 운동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방사능 급식 조례 운동>

 

방사능 급식 조례 운동은 이미 몇몇 지역에서 당이 주도하여 사업을 수행하였고 매우 큰 성과를 남기기도 했다. 방사능 급식 조례 운동은 탈핵 문제와 안전 문제를 생활과 밀접한 의제로 연결시킴으로서 지역 주민이 함께 할 유인을 높여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사업이다. 또한 이미 성과를 남긴 지역 사례를 당을 통해 유통시킴으로서 지역에서 사업화하기 용이하다는 장점도 있다.

 

주민발의로 방사능 급식 조례를 제정한 서울 구로 (사진: 구로당협)

주민발의로 방사능 급식 조례를 제정한 서울 구로 (사진: 구로당협)

 

<공공서비스 공단 설립 조례 제정 운동>

 

고령화 사회가 진척되고 복지 수요가 늘어나면서 한국 사회에서도 사회서비스의 확대가 불가피하다. 하지만 현행 한국의 사회서비스 공급 체계는 전적으로 민간 시장에 의존하고 있고, 그 비용만 정부가 지원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공급 방식 아래에서는 사회서비스 질 관리가 부실해지고 무엇보다 사회서비스 제공 노동자의 처우가 열악해지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보육 서비스의 경우 단순히 보육료 지원을 넘어 국공립 시설에 대한 요구가 존재하고 이를 위한 운동도 있어 왔지만, 장애인활동보조나 요양보호사업의 경우 아직까지는 지원 수준(바우처 비용)에 대한 논란이 주를 이루고 공적 공급에 대한 요구는 크게 조직화되지 못했다.

공공서비스 공단 설립 조례 제정을 통해 지역 정부가 이러한 사회서비스 제공을 위해 공적 공급 기관을 설립하게 될 경우 민간위탁에서 발생하는 업체 이윤 분만큼 절감 효과가 있어 이를 서비스 질 향상 또는 종사자 임금 인상에 사용할 수 있다. 민간위탁에 따른 업체 이윤 분은 평균 전체 비용의 7~10퍼센트에 달한다. 반면 대다수 사회서비스의 경우 예산 또는 기금을 통해 비용을 지원하기 때문에 공단 운영에 소요되는 지역 예산은 크게 소요되지 않는다.

 

2015년 중앙 정치 사업을 위한 몇 가지 제안

 

진보정치는 지역정치를 통해 당 활동의 근거지를 확대하는 것과 동시에, 중앙으로 집중된 전국적 정치 이슈에 대한 대응과 주도를 통해 당의 정치력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노동당이 2015년 전국적 이슈로 주도했으면 하는 의제를 아래와 같이 제안한다.

 

<직접세 증세 운동>

 

담배세가 결국 인상됐다. 박근혜 정부는 이를 금연 정책과 연동시키고 있지만, 실제로 이는 증세다. 지난 11월호 정책포럼에서 주장한 것처럼, 최근 몇 년간 세입 감소가 지속됐다. 2012년에는 기금을 제외한 세수 부분에서 2.8조 원 적게 걷혔고, 2013년에는 8.5조 원이 덜 걷혔다. 2014년 세수 감소는 최소 10조, 최대 20조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세수가 부족한 이유는 수출-내수 간 불균형, 제조업-서비스업간의 불균형, 노동소득과 기업소득의 불균형 때문인데, 이러한 불균형은 당분간 해소되기 어렵고, 현 정부는 해소하려는 의지 역시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2015년에도 세수 감소 문제는 지속될 것이다. 증세가 없다던 박근혜 정부가 꼼수 증세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당은 직접세 중심의 당론을 갖고 있다. 이러한 당론을 사회적으로 확대하기 위해 시민사회와 노동계, 진보정치 세력들에게 적극적으로 증세를 위한 연대 구축을 제안하고 합의를 모아가야 한다.

 

<정치개혁 유권자 운동>

 

지난 10월 헌법재판소는 인구 편차를 3대1 이하로 하는 현행 선거구 획정 기준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2015년 12월 31일까지 선거법을 개정해 2016년 국회의원 총선부터 적용해야 할 상황이다.

노동당을 비롯해 진보진영은 오랫동안 비례대표 확대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개혁을 주장해 왔다. 비례대표제의 확대는 투표를 통한 대표성을 보다 정확히 반영한다는 측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보수정당과의 선거연대에 의존하지 않는 독자적 공직 배출이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진보정치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실제 정치관계법을 개정해야 할 당사자들이 바로 정치개혁의 대상인 지역구 기반 의원이라는 점에서 보수 정당의 정치관계법 개정에는 태생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진보진영의 의견이 반영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정치관계법의 전면적이고 본질적 개혁을 끌어내기 위해 노동당은 진보정치 진영과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비례대표제 확대를 위한 유권자 운동’을 기획하고 연대를 확대하여 보수정당을 압박해 진보정치에 유리한 정치개혁을 이뤄내도록 적극 개입해야 한다.

 

<연금 개악 저지를 넘어선 대안 제시>

 

박근혜 정부는 개악된 국민연금을 기준으로 공무원 연금 개악을 시도하고 있다. 일단 공무원 연금 개악 시도는 2014년을 넘길 것으로 예상되지만, 2015년 상반기에는 보다 적극적 공세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노동계와 진보진영은 우선 공적 연금부터 강화하고 당사자가 포함된 사회적 대화기구를 수립해야 한다고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공적 연금 강화에 대한 구체적 안이 마련되기 전까지 현상유지의 입장으로 비춰져, 개악된 국민연금을 기준으로 ‘국민’과 ‘공무원’의 형평성을 문제 삼는 박근혜 정부의 공세에 취약하다.

당은 조속히 현행 연금 제도가 갖고 있는 사각지대와 낮은 보장성 문제에 대한 대안을 중심으로 합리적 연금 개혁안을 수립해 적극 대응하도록 해야 한다.

 

<비정규직 철폐 운동과 지역 주민 노동자 조직 운동>

 

박근혜 정부는 11월에 발표하려던 비정규종합대책을 12월 중순으로 연기했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기까지 발표는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2015년 상반기로 연기될 것이란 소문이 흘러나오고 있다. 지금까지 ‘소문’으로 알려진 박근혜 정부의 비정규종합대책의 주요 내용은 기간제를 더욱 고착시키는 ‘중규직’ 도입, 기간제 고용 제한 기간 연장, 파견직 허용업종 확대 등이다. 사실상 비정규직 오남용을 공식화하거나 더욱 확대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이와 더불어 비정규직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빌미로 정규직 임금 체계와 고용안정을 공격하고 있다.

노동당은 현 정부의 비정규직 확대 정책에 대해 단호한 반대와 더불어 비정규직 사용사유 제한 등을 전면 이슈화하고 진보진영 및 노동계와 연대 투쟁해 나가야 한다.

더불어 낮은 조직률로 사회적 목소리를 갖지 못한 비정규직 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해 지역에서 일상적으로 만나는 노동자와의 접촉면을 넓혀야 한다. 예를 들어 최근 신현대 아파트 사건과 2015년 최저임금 100% 적용을 앞두고 해고 대란의 위험에 처한 경비 노동자에 대한 지역 실태조사나 지역에서 늘상 마주치는 사회서비스 종사 노동자에 대한 조직화 지원과 연대 사업, 지역 내 알바 노동자 최저임금 등 노동조건 상담을 통한 조직화 등이 필요하다.

헌법재판소의 선거구 재획정 판결 뉴스 (사진: SBS 캡쳐)

밥그릇 싸움은 가라, 정치관계법 개혁 시작해야

[2014.12 제15호 정책포럼]

밥그릇 싸움은 가라, 정치관계법 개혁 시작해야

헌재, 선거구 재획정 결정 내려

 

윤현식|정책위원회 의장

 

 

 

지난 10월 30일 헌법재판소는 현행 공직선거법 중 국회의원 선거의 지역구 획정에 관하여 헌법 불합치 결정을 선고했다(2012헌마190, 192, 211, 325, 2013헌마781, 2014헌마53(병합)). 공직선거법 제25조 제2항은 국회의원 지역구의 명칭과 그 구역을 별표로 구분하여 규정하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 요지는 이 별표에 따른 지역구의 획정이 인구비례 3:1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데, 이것이 투표의 비례성을 현저히 해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인구비례 3:1로 되어 있는 현행 선거구 획정의 인구기준은 위헌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가)지역구의 인구가 (나)지역구 인구의 3배가 된다고 가정하자. 이때 (가)지역구에서 당선된 의원의 대표성은 (나)지역구 당선 의원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효과가 발생한다. 표의 등가성이 훼손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현행 기준이 선거에서의 평등원칙을 위배한다고 판단했다. 유권자의 한 표는 마땅히 동일한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원리를 재확인한 것이다. 표 가치의 평등은 국민주권의 원리나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만 할 사항이다. 인구의 균형, 행정구역의 편차, 지세, 교통사정, 생활권, 역사적·전통적 일체감 등의 원인으로 인하여 비례평등을 위한 1:1의 원칙을 관철하기 어려운 현실적 고충이 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밝히듯 “투표가치의 평등을 실현하여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토양을 마련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한편 헌법재판소는 헌법소원의 대상이 된 일부 지역에 대해서만 위헌성 여부를 판단할 수 없고 현행 선거구 획정체계 전반이 위헌일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했다. 헌법재판소는 “선거구 구역표는 전체가 불가분의 일체를 이루는 것으로서 어느 한 부분에 위헌적인 요소가 있다면 선거구 구역표 전체가 위헌의 하자를 갖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현행 선거구 구역표로 획정된 현재의 지역구 편재는 전면적인 재정리가 필요하게 되었다. 헌법재판소는 인구비례 최대 2:1을 기준으로 선거구 획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결정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2015년 12월 31일까지 공직선거법이 개정되어야만 한다.

 

인구비례 최대 2:1 기준으로 선거구 획정 바뀐다

 

이번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갑작스럽게 나온 것이 아니다. 헌법재판소는 이미 13년 전인 2001년의 결정(2001.10.25. 2000헌마92)에서 지속적인 제도개선을 통해 선거구간 인구편차가 2배 이상을 넘지 않도록 조정할 것을 주문하였다. 또한 향후 유사한 사례에 있어서는 인구비례 2:1 또는 그 미만의 기준에 따라 위헌여부가 판단될 것임을 예고한 바 있다. 무려 13년 전의 경고가 이번에 현실이 된 것은 그동안 제도정비에 관심을 두지 않은 국회에 책임이 있다. 헌재의 결정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표의 등가성이 선거제도의 기본원칙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국회는 합리적인 수준에서 공직선거법의 개정을 추진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동안 국회는 투표가치의 평등성을 높이려는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1987년 현행 헌법체제 이래 지금까지 시대적 상황과 정치적 환경 및 국민들의 인식 변화 등에 따라 의원정수 및 선출 방식, 선거구 조정 등이 이루어져야 했음에도 이를 게을리 했다.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이 국회의 게으름과 무능에 대한 신랄한 질책인 이유가 여기 있다.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부터 299명으로 한정되었던 의원정수는 2012년 총선에서 단 1명이 늘어난 300명으로 고정되어 있다. 전체 인구가 4천만 명 수준에 정해졌던 의원정수가 5천만 명이 넘는 지금까지 그대로인 것이다.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도입되었다고는 하나 1988년 당시 전국구를 75석 뽑던 것에 비해 현행 비례대표는 54명을 선출함으로써 오히려 줄어들었다. 국회의원의 지역 대표성을 이유로 특정지역의 의사가 과잉대표되는 것이 합리화될 수도 없다. 지방자치제도가 초기 도입될 당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지방자치의 수준이 높아진 현실을 감안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교통·통신 등 기술의 발전, 도농 간 교류의 확대 등으로 인해 낙후했던 과거만을 생각하고 지역 대표성을 운운할 근거는 사라졌다. 특히 중요한 것은 국회의원의 지역 대표성은 국가 전체의 이익을 대표하는 국회의원 본연의 임무 범위와 합치될 때만 당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미들을 검토한다면 헌법재판소가 밝힌 기준은 표 가치의 불균등함을 개선하는 합리적 기준이 되기에는 아직도 보수적인 수준이라고 판단된다. 헌법재판소가 설정한 이 기준은 선거구별 인구편차가 0에 가깝도록 해야 한다는 미국 하원선거의 기준이나 원칙적으로 상하편차 15%를 규정하는 독일에 비하면 아직도 매우 부족하다 할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기준은 일본이 1994년에 확인한 2:1 기준을 20년 후 한국에 적용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따라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과도한 것이라거나 향후 막대한 혼란이 가중될 수 있다고 우려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판단을 결여한 것일 뿐이다.

 

헌법재판소의 선거구 재획정 판결 뉴스 (사진: SBS 캡쳐)

헌법재판소의 선거구 재획정 판결 뉴스 (사진: SBS 캡쳐)

 

헌재 결정에 요동치는 지역들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표의 등가성을 지키라는 원론적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그 파문은 요란하다. 선거구 획정 대상이 된 지역구 의원들의 경우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특히 보수양당의 패권이 작동하고 있는 영호남의 지역구 의원들은 사태의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지역별로 선거구 획정을 다시 할 경우 현재의 기준에 따르면 지역구 의석은 서울 1, 경기 16, 인천 5석이 늘어나게 된다. 대전, 충남, 충북을 합친 충청권은 변동이 없다. 이에 반해 영남은 4석이 줄어들고 호남은 4~5석이 줄어들게 된다. 강원도 일부 줄어들게 된다.

지역의 맹주를 자처하며 한반도 남녘의 동서를 분할하고 있는 새누리와 새정연은 골치 아픈 계산을 하게 되었다. 어차피 빗자루를 꽂아도 당의 이름만 붙여놓으면 당선된다는 영호남이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당내 인사들의 이해관계가 서로 충돌한다. 예를 들어 부산 영도구와 인접한 서구의 지역구 재획정이 이루어지면 둘 중 한 선거구는 사라지게 된다. 영도구는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지역구이고 서구는 친박계 유기준 의원의 지역구다. 수도권 지역의 의석이 대폭 늘어나는 것도 보수양당에게는 골머리를 싸매게 하는 부분이다. 이렇게 되면 선거를 치루는 과정이 보다 복잡다단해지게 된다. 보수양당이 할거하고 있는 영호남과는 달리 수도권에서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정서만으로 선거에서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앉아서 거저먹는 것만으로도 본전치기를 할 수 있었던 봄날이 가버리는 거다.

이처럼 골 아픈 상황을 피하면서 동시에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보수양당에게는 급선무가 되었다. 여기에는 전제가 있는데 바로 현재의 의석수를 재조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도개선을 한다는 점이다. 즉 지역구 246석, 비례 54석, 총 300석 의석에 변동을 주지 않은 채 지역구 획정을 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보수양당의 입장에서는 전체적으로 현재와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내부적으로 후보들 간 및 지역 간의 알력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앞서 보았듯이 영호남과 강원의 의석이 줄어들게 될 경우 이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보수양당의 정치인들이 감수해야 할 손실은 말 그대로 정계은퇴가 될 수도 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확인한 인구비례 2:1로 조정해야 할 각 선거구를 보면 인구수 초과 선거구는 37개, 미달 선거구는 25개다. 인구 초과 선거구는 쪼개고 미달 선거구는 합쳐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미달 선거구를 지역구로 하는 의원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소선거구 단순다수대표제를 근간으로 하는 현행 제도 하에서 지역구 의원들의 반발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비례의석을 대폭 줄이고 지역구 의석을 늘리는 것이다.

노동당을 비롯한 군소정당들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과거 민주노동당이 헌법소원을 제기함으로써 만들어냈던 정당명부비례대표제는 유명무실한 제도로 전락하고, 군소정당의 원내진출의 길은 더욱 어려워지게 된다. 이제는 보수양당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제도 전반에 대한 사회적 문제로 전환된다. 보수양당의 입장에서 굳이 문제를 불거지게 만들어 대중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이유는 없다. 그래서 제기되는 대안들이 중대선거구제, 석패율제, 도농복합선거구제와 같은 제도들이다. 하지만 이들 제도 역시 노동당 등 군소정당들에게 유리할 것이 없다. 중대선거구제는 현재 지방자치선거에 도입되어 일부지역에서 시행하고 있으나 지역의 맹주노릇을 하는 정당 소속 당선자들의 숫자만 불려주는데 그치고 있다. 도농복합선거구제는 무엇보다도 선거구 획정 자체가 어려워 도입될 가능성도 적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보수양당에게 손해가 될 여지도 거의 없다. 석패율제는 일본에서 시행되고 있는 제도로서 지역구에서 낙마한 후보를 비례로 부활시키는 제도이다. 마찬가지로 보수정당의 당선자를 늘리는데 도움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군소정당들에게는 동기부여를 하기 어려운 제도다.

 

국회의원정수, 비례대표 획기적으로 늘려야 하는데

 

현행 공직선거법의 한계 안에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현실화하기 위해 가장 확실하게 제안될 수 있는 대안은 국회의원정수의 획기적인 증원이다. 단순계산만으로도 인구 4천만에 설정된 300명 의원정수를 5천만에 맞게 375명으로 늘릴 수 있다. 또는 인구 10만 명당 1명의 수준으로 의원을 설계해 500명으로 늘리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어떤 방식으로든 국회의원의 정수가 상당수 늘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기계적으로 의원정수를 늘리거나 지역구 조정을 하는 것만으로 표의 등가성을 높일 수는 없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를 경우 현행 제도 하에서 서울·경기·인천의 수도권에서만 22석이 늘어나게 되는데, 이러한 결과는 수도권 지역이 과잉대표됨으로써 지역 대표성의 평등을 깨게 된다. 따라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목적한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는데 현행 공직선거법의 구조는 근본적인 한계로 작용한다.

무엇보다도 우선 검토해야 할 것은 현행 ‘소선거구 단순다수대표제’ 국회의원 선출방식을 유지할 것인가이다. 무수한 사표가 발생하고 표의 등가성을 현저하게 해치며 승자독식의 폐해를 보이고 있는 현행 제도는 그 자체를 손질해야만 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바람직한 방식이 비례대표의 획기적인 증원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독일식 정당명부제 도입 요청이 있었다. 지역구 의석을 유지하면서 비례대표를 확대하고 표의 등가성을 확보할 수 있는 좋은 방식이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간 것이 바로 전면비례대표제의 도입이다. 노동당은 이미 2012년 총선 공약을 통해 ‘광역단위 전면비례대표제’를 제안한 바 있다. 우선 전국을 대권역으로 나누고 각 권역별 최소의석을 우선 할당한 후 인구비례에 따라 나머지 의석을 배분한다. 정당은 권역별로 각 당의 후보명부를 제출하고 유권자는 지지정당과 해당 정당명부 내 선호 후보자 1인을 선택하게 한다. 정당득표율로 당선자 수를 정하고 명부 내 각 후보의 득표율 순위로 당선자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 경우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지역 대표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또한 비례대표의 강화를 통해 국회의원의 직능 대표성 또한 강화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당의 제안이 제도정치권 안에 수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별로 없는 것이 현실이다. 보수양당 체제로 형성된 기득권을 마음껏 향유하고 있는 새누리와 새정연이 비례대표의 대폭적인 확대 혹은 전면비례대표제를 수용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보수양당은 군소정당의 원내진출을 막기 위한 진입장벽을 더 높이 쌓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예컨대 19대 국회에 올라와 있는 공직선거법 개정안 중에는 대통령선거 방송토론회 참가 자격을 국회의원 10인 이상 소속 정당, 직전 선거에서 10% 이상 득표율을 가진 정당, 선거기간 개시 전 여론 지지율 10% 이상인 후보자에게만 주는 법안이 올라와 있을 정도다. 이 외에도 군소정당의 정치활동과 선거운동에 제약을 주게 될 각종 정치관계법 개정안이 발의되어 있다. 다 들여다 볼 것도 없이, 보수양당이 추구하는 정계구획의 상이 무엇인지는 설명의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명확하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리그를 결코 개방할 생각이 없다.

 

참정권 회복 운동, 정치관계법 개정 의제화 해야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첫째, 시민사회가 당사자 운동으로서 참정권 회복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둘째, 군소정당 특히 진보정당들과 녹색당이 결합해 정치관계법 개혁 의제를 공통의 사업으로 진행할 필요가 있다. 앞의 것은 보수양당이 현실적인 위기감을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여론의 압력이라는 점에 착안한다. 운동의 주제와 내용은 말 그대로 무궁무진하다. 현행 정치관계법, 즉 정당법, 정치자금법, 공직선거법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뜯어고치지 않으면 안 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뒤의 방법론은 산개해 있는 진보진영이 공통사업을 통해 상호 신뢰를 회복하고 정치관계법 개혁운동을 보다 강도 높은 수준으로 전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내면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번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국회의원 선거와 관련된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보다 정의롭고 효과적인 선거제도를 설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주목해야 한다. 문제는 이러한 의미와 기회를 살려갈 수 있는 역량이 우리에게 있는지, 수도 없이 기획해왔던 변화의 방향을 사회적인 호응과 지지 속에서 추진할 수 있을지다. 노동당의 안타까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정치관계법은 전면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부연의 필요 없이 이 문제는 당의 사활을 건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에 대응해 주체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점은 현실적 부담이다. 이 부담을 던지고 사활을 건 문제에 사활을 걸고 대응하는 것이 지금의 과제다.